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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龍寺重創事蹟碑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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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02-06 10:30 조회6,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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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角一脈 落來十餘里하야而起하니 卽漢陽之外靑龍也 山之中麓 有寺하니 曰靑龍寺也 山容回抱하야 自作一局하니 眞城市之第一勝區也 寺之開基는 在新羅景明王六年이요 而高麗太祖 因道詵國師之遺言하야 建寺於漢城之靑龍麓할새 命慧圓尼師住持하야 朝夕以鳴鍾爲祝三國統一이라 盖取諸金克木之原理而亦爲尼寺之第一道場也
若夫海岳之相遷 風雲之變態 則靖宗二年 萬善尼師 因頹落而重創하고 毅宗十二年 懷正禪師 爲國泰民安하야 奉御命而重創하고 忠烈王二十五年 知幻尼師 因蒙古之兵亂而重創하고 入于李朝하야 太祖卽位 麗末恭愍王之惠妃 失國而爲僧하야 住錫於當寺하고 且也太祖卽位七年 以世子之冊封不平으로 王子之亂 大起하야 繼妃康氏所生慶順公主 蒙父王之指示하야 入于當寺而削髮하고 太宗五年 依無學王師之奏請하야 以御命而重創하고 世祖二年 端宗流配 王妃宋氏與後宮二人侍女三人 同共剃頭於此寺하야 送了百年之恨하고 中宗七年 因燕山君之廢寺毁佛 法空尼師 重創하고 仁祖二年 禮順尼師 奉仁穆大妃之命하야 爲祝永昌大君之冥福하고 又從以重創之하며 于英祖四十七年 英祖爲端宗定順王后하야 仍於古基하야 乃下命一新重創하고 又王妃一生所居之處 不可以一般寺院名稱呼之라하야 於是改靑龍寺爲淨業院하니 盖取其古昔宮中妃嬪宮女之所出入內佛堂之名稱也 又賜碑文曰淨業院이라하고 舊基賜懸額曰前峰後岩 於千萬年이라하니 皆御筆書之 立碑建閣 至今尙存하니 盖國家文化財之一也 純祖十三年 忽因鬱攸之災하야 寺院全燒하고 至于翌年 妙湛守仁兩尼師 協力重創하고 二十三年 純祖王妃 適有无妄之患이러니 其親父金祖淳 就淨業院祈禱하니 患候不日일라 祖淳奏請하야 更以御命으로 改淨業院爲靑龍寺하야 還元而呼之也 高宗光武六年 正基昌洙兩尼師 同共發心하야 以昌洙之回甲紀念으로 因以重修之하고 日帝治下戊午年 祥根尼師 辦出私財하야 創建寮舍一棟하야 至于壬申回甲之年 全體建物 一新重修하고 乙酉解放以後 庚子年 現住持輪浩尼師 擴張古基하야 十王殿尋劒堂雨花樓極樂殿等 一新重創이라 盖在創建時 寺址都不過二百九十九坪이어늘 而祥根住持之時 買入垈地百八十坪이라 至于現在하야 寺址二百九十九坪이요 垈地四百五十三坪이요 林野百二十坪也 儒典所謂父作之子述之者 是也 自開基以來 歷兩朝 重創重修者 凡十一回而不雖年間 畵閣寶殿 儼然高秀者 天也 非人也라.
師於是 以禪定者爲之骨하고 以看經者爲之肉하고 以粥飯者爲之皮하고 以行智具足者爲之眼目하고 爲之手足이면 則一刹之內 儼然具一箇法王之體也리라 其法王之爲體也 沖虛妙粹하고 炳煥靈明하야 入萬殊而不變하고 古今而爲一이니 則安知秋毫不爲大而泰山不爲小 又安知子不爲壽而彭祖不爲夭也耶 後之視今 猶今之視昔也 後之視後 亦猶後之視今也리라 然則道詵國師之開基 輪浩住持之重創 是同耶 是異耶 若云是同이면 牛角不用有 若云是異 兎角不用無로다 且道하라 畢竟如何 古人云 道眼未明이면 滴水難消라하니 凡參此寺者 常念身隣泡하고 命危風燈하며 又常念法性本空이요 慧日長明이라 如是策勤하고 如是悟入이면 則非但四恩之重大一時報畢이라 亦不負今日外護之功也리라
佛紀 二千九百九十九年 壬子 四月 八日也
五臺山人 呑虛宅成 識
【번역】
삼각산 한 줄기가 십여 리 떨어져 내려오다가 우람하게 일어선 곳이 바로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이다. 삼각산 중턱에 사찰이 하나 있다. 바로 청룡사이다. 산자락이 두루 감싸안아 하나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으뜸 가는 곳이라 하겠다.
이 사찰의 창건은 신라 경명왕 6년(922)에 있었으며, 고려 태조가 도선국사의 유언으로 서울 청룡 기슭에 절을 세우고, 혜원 비구니를 주지로 임명하여 조석으로 종을 울려 삼국통일을 축원하게 하였다.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克木)”는 원리를 취한 것이며, 또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가장 으뜸 가는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상전벽해의 세월과 풍운의 무상한 변화로써 정종 2년(1036)에 만선 비구니가 퇴락한 사원을 중창하였고, 의종 12년(1158) 회정선사가 국태민안을 위해 어명을 받들어 중창하였고, 충렬왕 25년(1299)에 지환 비구니가 몽고의 병란으로 인하여 중창하였다.
이조에 들어서는 태조가 즉위하자, 고려말 공민왕의 혜비가 나라를 잃고서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또 태조 즉위 7년에 세자의 책봉에 불평을 가져 왕자의 난이 크게 일어나자, 계비 강씨가 낳은 경순공주는 부왕의 명에 따라 이 사원으로 들어와 삭발하였고, 태종 5년(1405)에 무학대사의 주청에 의해 어명으로 중창하였고, 세조 2년(1456)에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송씨는 후궁 2인, 시녀 3인과 함께 이 절에서 삭발한 채, 백 년의 한을 품고 일생을 보냈으며, 중종 7년(1512)에는 연산군의 폐사(廢寺)와 훼불(毁佛)로 법공 비구니가 중창하였다.
인조 2년(1624)에는 예순 비구니가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고 또 다시 중창을 하였으며, 영조 47년(1771)에 이르러서는 영조가 단종과 정순왕후를 위해 옛 사원 터에 새롭게 중창하도록 명하였고, 또 왕비가 일생 거처했던 곳을 일반 사원의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 하여 이에 청룡사를 정업원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옛날 궁중의 비빈과 궁녀들이 출입하였던 내불당의 명칭을 취한 것이다. 또한 정업원이라는 비문을 쓰고, 옛 터전에 앞산의 봉우리 뒷산의 바위여! 천만 년이 영원하리라.는 액자를 하사하였다. 이는 모두 어필로 기록하여 비석과 누각을 세운 것인데,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국가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순조 13년(1813)에는 뜻하지 않는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어 그 이듬해에 묘담, 수인 두 비구니가 협력하여 중창하였고, 23년(1823)에는 순조의 왕비에게 때마침 생각지 않은 병환이 있어 그의 생부인 김조순이 정업원을 찾아가 기도하자, 병환이 곧 회복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김조순이 주청하여 다시 어명으로써 정업원을 청룡사로 환원하여 부르게 되었다.
고종 광무 6년(1902)에 정기, 창수 두 비구니가 함께 발심하여 창수 비구니의 회갑기념으로 이를 중수하였고, 일제치하 무오(1918)에는 상근 비구니가 사재를 내어 요사채 1동을 창건하였고, 임신년 회갑을 맞이하여 전 사원의 건물을 하나같이 새롭게 중수하였다. 을유 해방이후 경자(1960)에는 현 주지 윤호 비구니가 옛 터전을 확장하여 시왕전, 심검당, 우화루, 극락전 등을 하나같이 새롭게 중창하였다.
창건시의 절터는 모두 299평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근 비구니가 주지할 때 대지 180평을 매입하여 현재의 절터는 299평, 대지 453평, 임야 120평에 이르렀다. 유교 경전에서 말한 아버지가 일으킨 일을 자식이 전승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사원을 개창한 후로 고려 조선 두 조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창과 중수를 거듭한 것은 모두 11회이며, 몇 년이 안 되는 사이에 단청한 누각과 법당이 위엄스럽게 높고 빼어난 것은 하늘의 힘이지 사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주석한 스님들이 이에 선정으로 뼈를, 경전을 보는 것으로 살을, 죽과 밥으로 가죽을, 행실과 지혜가 구족한 것으로 안목과 수족을 삼는다면, 사찰에 의젓한 법왕의 본체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법왕의 본체란 텅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하고 밝아서 일만 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도 변하지 않으며, 고금이 다하도록 하나이다. 어찌 가을 털끝을 크다 하고 태산을 작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일찍 요절한 사람을 장수를 누렸다 하고, 장수한 팽조를 요절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은 마치 오늘날의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으며, 후대의 사람이 후대를 보는 것 또한 후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도선국사의 창건과 윤호 주지의 중창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만일 같다고 한다면 소뿔은 있어도 쓸모 없는 것이며, 다르다 한다면 토끼의 뿔은 없어도 쓸모 없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필경 어떤 것인가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안이 열리지 않으면, 한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렵다. 하였다. 이 사원을 찾는 이들이 항상 자신의 몸이란 물거품과 같고, 사람의 운명이란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등불처럼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또 항상 법성은 비어 있으며 지혜의 태양은 길이 밝음을 생각하여, 이와 같이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 하고, 이와 같이 깨우쳐 들어간다면, 중대한 그대 은혜를 일시에 보답할 뿐 아니라, 또 오늘날 외호의 공덕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불기 2999년(1972) 임자 4월 초파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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