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의 苦惱를 宗敎에 묻는다(7)-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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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12-06 13:35 조회6,592회 댓글0건본문
〔7〕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超克), 무생(無生)의 생은 영원한 생(生)
윤태림 : 이제 다음 문제로 넘어가서 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超克)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공자님께서 제자가 죽음이라는 것이 뭐냐고 물으니까 우리가 생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데 죽음까지 다루겠냐는 말씀이 있었고, 또 실존주의 사상에서 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며 이 문제를 극복해야만 참다운 인간의 삶을 계속할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생이라 할 때도 물론 생명이라고 할 경우에는 그것이 생물학적인 생명현상으로 볼 수 있고, 또 생을 일상생활의 면에서 본다면 하나의 경제적 영위로서 생활이라고 볼 수 있겠고, 또 생이라는 것을 인생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인생관․도덕관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신비적으로도 볼 수 있고, 추상적으로도 볼 수 있는데 물론 견해는 다릅니다만 베르그송은 이성(理性)이나 오성(悟性)이라는 것보다도 생명의 생성 발전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얘기했지요.
우선 여기에 대해 불교에서 본 견해가 아마 근본 문제를 터치하는 견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탄허 : 이 몸을 가지고 사는 생이라는 것은 백년 미만에 없어집니다. 백년 미만에 없어지는 몸을 가지고서 우리가 망상을 피우는 것은 항하사(恒河沙) 수로도 셀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백년 미만의 몸뚱이를 가지고 항하사 수보다도 더 많은 망상을 좇아간다면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위태한데도 불구하고 그 망상을 좇아가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보는 궁극적인 생은 영원무궁한 생이지 백년 미만의 생이 아닙니다. 영원무궁한 생이라는 것은 나는 것이 없는 생[無生의 生]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도(道)와, 다시 말해서 성(性) 자리와 결부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생입니다. 시공이 끊어진 그 자리가 바로 무생(無生)의 생(生) 즉 영원의 생이지요. 따라서 불교의 생의 의미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생의 생 즉 영원의 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생의 생을 타파하고 나면 죽음의 길도 없습니다. 본래 생사는 둘이 없는 자리로, 태어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있게 되는데, 나는 것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사가 둘이 아닌 경지, 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마찬가지인 경지를 타파한 분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부처님 당시 가섭존자부터 중국의 혜능대사(慧能大師)에 이르기까지 33조(祖)는 부처님과 같은 분들이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지요.
죽고 사는 문제를 옷 입고 버리듯 했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생사가 본래 없다는 것을 밝힌 구절이 경전에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육조(六祖) 혜능의 말씀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겁화소해저(劫火燒海底)하고 풍고산상격(風鼓山上擊)이라도 진상적멸락(眞常寂滅樂)은 열반상여시(涅槃相如是)라” 즉 “겁(劫) 불이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고동쳐 산이 서로 부딪치더라도(이때는 우주가 무너질 때를 말합니다) 참되고 변함없는 적멸(寂滅)의 즐거움은 열반의 모양이 항상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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