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사는 智慧(부처님 오신날을 맞아)-2_대담/金恒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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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5-05-09 13:25 조회6,041회 댓글0건본문
〔2〕달마의 사행관(四行觀)
김항배 : 조사님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들어가는 길 중 달마스님의 사행관(四行觀)이 간절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스 님 : 사행관이란 첫째 보원행(報冤行), 둘째 수연행(隨緣行),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 넷째 칭법행(稱法行)이지요. (달마스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은 사행관에 대하여 말씀하기 이전에 不立文字에 대한 잘못된 인식부터 말씀하신다.) 달마대사가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 것이 그 당시의 병은 조금 고쳐 주었지만 후세에는 큰 화근(禍根)이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달마조사가 ‘불립문자’라 했다해서 요즈음 무식한 수좌들은 흔히 문자가 쓸데없다고들 하지요.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은 하나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불립문자’라는 말이 문자가 쓸데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육조스님의 말씀을 들어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육조스님도 달마스님의 전법제자입니다. 육조스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너희들이 달마의 말씀을 빌어 걸핏하면 문자가 필요 없다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가 미(迷)한 것은 옳거니와 어찌 부처님의 경전까지 비방하는가. 이런 견해는 그릇된 것이니 마땅히 고쳐라.”
당시 달마대사가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광통율사, 보리유지 등이 교리(敎理)에만 집착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마의 말은 교리에 집착해 있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시 이제 와서 병이 되어 버렸지요. 불립문자라는 말은 문자가 주체가 된다는 말이 아닐 뿐이지 쓸데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로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너는 경을 보아라.” 하셨습니다. 앙산스님이 “평소에 경을 보지 말라고 하시더니 어찌 저에게는 경을 보라 하십니까?” 하니 위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제 할 일도 못하지만 너는 인천의 스승이 되어야 하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또 어느 날 위산스님이 경을 보고 있노라니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저희들에게는 경을 보지 말라고 하시더니 스님은 왜 경을 보십니까?” 했지요. 그래서 위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눈가림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저희들은 무얼하고 있는 겁니까, 저희들 역시 눈가림하는 것이 아닙니까?” “너희들은 소가죽도 뚫는다(牛皮也透得).” 했습니다. 그만큼 집착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르치는 방법들이 모두 다른데 말을 바로 보고 바로 듣는 사람은 그런데 걸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사행관에 대해서 설명하면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을 당해도, 어떤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되지요. 중국 사람들은 칼을 맞고 죽을 때도 (합장을 하며) ‘천명(天命)’이라고 말합니다. 멀리 유교․도교에서부터 싹터 온 사상이지요. 아무리 죽음을 당해도 그들은 천명이라 생각하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액난을 당해도 과보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히 갖는 것 이것이 보원행입니다.
다음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입니다. 고통이란 원(願)이 많은 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구할 바가 없다고 하면 그것이 가장 잘 구하는 것입니다. 도를 구하는 것은 구하는 바가 없는 구함이지요. 이에 비해 재(財)․색(色)․식(食)․명(命)․수(睡) 등 오욕을 구하는 것은 구할 바 있게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고통이 많은 것이지요.
수연행이라고 함은 인연(因緣)을 따르는 행입니다. 연을 따른다 함은 굳이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서 행하는데, 무슨 일이 닥쳤을 때 응작(應作)․불응작(不應作)을 관해서 응당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피하는 것은 이기심(利己心)이고, 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것 또한 안 되는 것이지요. 해서 안 될 일은 과감히 끊고, 해야 할 일은 목숨을 바쳐서 하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라 할 수 있지요. 그와 같이 연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수연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적인 법이 아니지요. 다시 말해서 진리에 합한다는 말로써 위의 세 가지 행이 모두 법에 합하는 것입니다. 법에 합한다 함은 능(能)과 소(所)가 다 끊어진 것, 즉 내가 하는 바도 없고 할 바도 없어진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부연하면 위에서 말한 것의 마지막 결론이 칭법행인 것입니다. 이것이 달마의 사행관으로서 이 사행(四行)을 통하여 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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