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발발한 무위진인(活鱍鱍한 無位眞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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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8-22 21:26 조회8,467회 댓글0건본문
活鱍鱍한 無位眞人
산승은 본시 문자를 좀 읽은 바 있으나 문자를 떠난 문자를 보려고 노력했으며, 말을 떠난 말을 이해하려고 힘써 왔습니다. 산승의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 정각원의 개원 기념법회에서도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왕 이 자리에 섰으니 부처님 가르침의 진의(眞意)가 어디에 있는가를 부처님과 조사(祖師)님들의 말씀을 통해서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옛날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물으니, 조주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청주(靑州)에 머물면서 장삼(長衫)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답변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따질 수도 없고, 말이나 생각으로도 분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스님이 와서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조주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놓아라〔放下着〕.” 하셨습니다. 즉 모든 것을 놓아 버리라는 말입니다. 스님이 다시 묻기를 “아무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으라는 말씀입니까?” 하니, “놓아 버리기 싫거든 짊어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물건이란 한생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놓아 버리라’고 가르치신 까닭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놓아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스님이 묻기를 “한생각도 일으키지 않았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허물이 수미산과 같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아는 것보다는 아는 것까지 끊어진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사량(思量) 분별(分別)인데, 이 사량 분별로는 실상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마음에 계합(契合)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끊어진 자리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보살의 여든한 가지 행(行) 가운데 어린아이의 행(行)이 가장 수승(殊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가와 도가 그리고 기독교와도 모두 일치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 등 여러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육단심(肉團心)이란 심정(心情)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연려심(緣慮心)은 모든 대상의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생멸(生滅)의 마음이고, 집기심(集起心)은 표면적으로는 생멸이 없는 것 같지만 잠재의식 속에 쌓여 있어서 생멸의 인(因)이 되는 마음입니다. 이와는 달리 견실심(堅實心)은 일체의 생멸이 끊어진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마음인 바 이것이 우리의 본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본마음을 깨닫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선(禪)에도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小乘禪), 대승선(大乘禪), 최상승선(最上乘禪) 등 여러 가지 선이 있습니다.
외도선과 범부선은 불교의 수행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외도선과 범부선에서는 밖에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승선부터가 불교적 수행인데 소승선에서는 아(我)가 공(空)했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 밖의 경계가 공(空)했다는 것까지는 깨닫지 못하여 대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대승선에서는 밖의 대상까지도 공(空)했다는 사실을 알아서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선(禪)입니다. 최상승선이란 우리의 마음 그대로가 불과(佛果)로써 진리와 차이가 없음을 믿어서 닦을 바도 없고 행할 바도 없으며 증(證)할 것도 없다고 하는 선(禪)입니다. 이것이 참된 불교적 선(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1찰나(一刹那)도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1찰나에 9백 가지 생각이 생멸(生滅)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선(禪)을 수행하다 보면 조용해지는 마음, 즉 정념(靜念)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타(自他)가 본시 공(空)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조용해진다고 하는 생각까지 버려서 조용하고 소란함이 둘이 아니요, 모든 대립(對立)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진여심(眞如心)을 자각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밖에서 찾아 얻으려는 것이 아니며 본시 정(定)한 진여자심(眞如自心)을 자증(自證)하려는 것이므로, 모든 것을 헤아려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 없음을 귀하게 여기며, 인위적인 행위보다는 아무 꾸밈없음을 소중히 여깁니다.
불교에서 무념(無念)과 무위(無爲)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단지 소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가 곧 무념이며 모든 행위가 곧 무위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다 더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사고입니다. 즉 모든 것을 생각하되 생각한다는 상(相)을 지니지 않고 생각하며, 모든 일을 하되 한다는 생각 없이 할 때 참으로 자유롭고 활발한 참사람의 생활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인간〔眞人〕으로서 자유롭고 자신 있게 살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이 법어는 1976년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의 개원기념 법회에서 하신 법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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