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衆法語_올해의 가난은 송곳마저도 없도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8-18 21:26 조회8,038회 댓글0건본문
大衆法語
올해의 가난은 송곳마저도 없도다
수천 길 벼랑에서 떨어지다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선가(禪家)에서는 여래선(如來禪)보다 조사선(祖師禪)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지 않는가? 본래 청정하며 실(實)다운 부처님의 마음자리를 우리는 견실심(堅實心)이라 일컫는다. 견실심의 밑바닥까지 가서 이것을 완전히 보았을 때 비로소 조사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앙산(仰山)이 향엄(香嚴)에게 묻기를 “요사이 아우님의 견처는 어떠한가?” 향엄은 곧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去年貧未是貧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今年貧始是貧 금년 가난이야말로 정말 가난이네
去年無卓錐之地 지난해 가난은 송곳 세울 땅도 없더니
今年錐也無 올해엔 송곳마저도 없어졌네
그러자 앙산은 “그대가 여래선은 얻었으나 조사선은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옛날에 어떤 스님이 “내가 조사선을 얻었다.”고 하니, 다른 스님이 말하기를 “아직 멀었다.”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은 향을 피워 놓고 선정(禪定)에 들어 그 향이 다 타기도 전에 열반에 들었는데 그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앉아 죽고 서서 죽고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지만 조사선은 못 보았다.”고 했다.
이와 같다고 한다면 팔만대장경은 모두 죽은 말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그것은 생각이 붙고 말이 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과 말〔言語〕이 모두 끊어진 자리는 팔만대장경으로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방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지 대청이나 문 밖에 도달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 여동빈(呂洞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선도를 닦아 5만 년 사는 법을 성취하였는데 어느 날 황룡선사(黃龍禪師)가 설법하는 곳에 들어가 몰래 설법을 듣게 되었다.
황룡선사가 대중을 훑어보며 “이 가운데 어느 놈이 나의 법을 도둑질하는고?”
그러자 여동빈은 하는 수 없이 “제가 5만 년 사는 신선도를 성취한 사람인데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그대에게 묻겠는데 천지가 생기기 전의 면목이 무엇인가?”
여동빈은 입이 꽉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황룡선사가 말하기를 “물이 다하고 땅이 다하고 나면 황룡이 출현하리라.”
이 말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한 여동빈은 신선도 닦기를 그만두고 발심하여 불문에 귀의하였다 한다.
그가 비록 육신으로는 수만 년 사는 이치를 얻었다 하나 황룡선사를 만나기 전에는 도(道)의 바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듯 여래의 본래 청정한 마음은 밑바닥을 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일단 발심을 했다면 견성성불을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가다가 말겠다는 마음으로는 참된 진리를 볼 수 없다. 진리의 나뭇가지를 붙잡은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손을 놓고 참된 진리에 떨어져 죽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사람이 배를 타고 갈 때 온몸이 물 속에 빠져야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미하기 때문에 진리를 향하여 매진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 개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온 집안 사람들이 찾아 나서는데 하물며 자기 마음이 바깥 경계에 부딪혀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서야 될 일인가?
『장자(莊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종묘 제사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가 돼지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석 달 동안 너에게 좋은 음식을 주고 또 너에게 비단옷을 입혀서 오색 도마 위에 모셔 놓고는 천자로부터 만조백관이 모두 너에게 절하게 할 터이니 네가 제물이 되어 주겠느냐?”
그러나 돼지는 “그렇게 해서 내가 희생이 되느니보다는 차라리 더러운 우리 안에서 더러운 음식 찌꺼기를 먹으면서도 목숨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다.
하물며 돼지도 이와 같은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신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잃어버린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는가?
거울 속에 삼라만상이 비춰질 때, 우리 범부는 거울보다도 거기에 비친 상(相)에만 집착한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거울에 비친 영상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서 그 거울의 본체를 깨닫고 그 밑바닥까지 철저히 찾고야 말겠다는 철두철미한 발심(發心)을 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