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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11월호]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문수보살의 지혜를 보듬고 있는 절, 오대산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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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단기출가학교 작성일10-12-06 10:00 조회8,20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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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불교, 아름다운 사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문수보살의 지혜를 보듬고 있는 절, 오대산 월정사_장인석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문수보살의 지혜를 보듬고 있는 절,
오대산 월정사


공군 조종사 간에 이런 이야기가 유명하다고 한다. 하늘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딘가 하면 바로 오대산의 적멸보궁이라는 것이다. 연꽃봉오리 같은 산세에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천하의 명당 터이니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 옛날 자장(慈藏, 590~658) 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아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 궁(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중의 한 곳이다. 나그네가 적멸보궁을 찾은 날은 단 풍이 이제 막 색깔을 머금기 시작한 10월 11일.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을 거쳐 적멸보궁까지는 40분, 멀지는 않으나 가 파른 계단길이라 불심을 내야 힘이 덜 드는 길이다.

그러나 이날 45인의 단기출가자들에게는 불심만으로 오르기에는 벅 찼던 것이 분명하다. 악을 쓰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이마에는 멍이 들었다. 상원사에서부터 삼보일배로 오르기 때문이었 다. 그들은 “석가모니불”을 외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고행이란 이토록 힘들다고 느끼고 있었을까, 구도는 멀고도 먼 길이구나 생각했을까.

적멸은 부처의 세계다.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경지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다. 부처의 진신인 적멸보궁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세상사를 바 라보며 그 자리에 있었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단기출가자들이 언뜻 부처의 옷자락이나마 만졌다면 그것은 출가로 이어 질 인연일 것이다. 자장율사가 세운 적멸보궁에 단기출가자들을 삼보일배로 참배케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오 랫동안 수행 공간으로 은둔해왔던 오대산 월정사가 포교의 중심에 서서 재가자들의 관심을 뜨겁게 받게 된 것은 단기출 가학교가 문을 열면서부터였다.
 
수행 공간을 세간에 열어 속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단 기출가학교는 2004년 2월 주지로 부임한 정념(正念) 스님의 평소 소신이 만들었다. 도시 문명이 심화되고 있는데 절과 스님이 산중에만 안주해서는 ‘하화중생’은 요원하기 때문에 가치 지향적인 삶을 포교하기 위해서는 절과 중생이 가까 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30일의 수행 출가는 속인에게는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변화의 계기로 삼고 수행이란 산중 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개월 단기출가 학교는 개설하자마자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60명 정원에 4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를 끌어 6년간 24기까지 배출되었 다. 동문만 1,400여 명에 실제 출가로 이어진 승려만 해도 100여 명이나 된다. 지난해 출가한 한 사미승은 “출가를 하 지 않더라도 참가자 거의 모두 내면의 변화에 만족스러워한다”면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수보살의 수행 성지가 된 연꽃봉오리

산중의 절을 도심으로 끌어내려 불교의 현대화를 실천하고 있는 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는 태생적으로 보살행과 인연 이 깊다.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그대의 나라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 곳에 머물러 있으니 가서 뵙도록 하시오”란 말을 들은 자장 율사는 강원도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기 위해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이곳이 훗날 월정사가 되었다.



이후 문수보살의 성지가 된 오대산은 다양한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성지신앙으로 확대되었다. 1911년에는 전국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주의 사찰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던 월정사는 1950년 한국전쟁의 참화로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광응전, 진영각 등 17동 건물이 모두 불타고 소장 문화재와 사료 들도 재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월정사는 1964년 탄허(呑虛) 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그 뒤로 만화(萬化) 스님과 현해(玄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중건하여 이룩한 것이다. 몇 차례 화재와 전화로 많은 성물과 문화재를 잃긴 하였지만 나름 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당우들이며 국보로 지정된 팔각구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오대산을 근대 수행도량의 성지로 승화시킨 스님은 대종사로 추앙받는 한암(漢巖)이다. 경허(鏡虛), 만공(滿空), 수월(水月) 과 함께 근세에 선풍을 중흥시킨 한암 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한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가 발심하여 장안사 행름(行凜) 노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는데,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운수행각에 나섰다가 성주 청암사의 경허 화상을 만났다. 차를 마시다가 경허 화상이‘선요’의 한 구절인‘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자, 한암은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이 앞에 섰다”고 대답하였다.

경허 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고 인가하였다. 이때가 스 물네 살이었다. 한암은 서른 살 되던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 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때가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 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선풍을 크게 떨 쳤다. 당시 송만공(宋滿空) 스님과 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암 스님은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오대 산에 들어갔다.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 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되었다. 일사후퇴 때에 국 군이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불태우려고 했을 때, 한암 스님은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나는 부처님 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 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 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 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한암 조실 스님이 모두 안전지대로 피 하라고 하였으나 조실 스님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남아서 선사의 좌탈입망을 지켜보았던 효법손이 바로 만화 스 님이다. 상원사 현판을 비롯해 월정사와 산내 암자의 글씨 중 대부분은 탄허 스님이 쓴 것이다.

가히 선필이라 칭할 정도로 탄허 스님의 글씨는 자유분방하고 힘이 넘친다. 191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탄허 스님은 어려서부터 한문학 전 과정을 마치 고 열다섯이 되던 해에 충남 보령에서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에게서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하였으나, 학문의 한계를 느껴 진리를 말해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열아 홉 살에 처음으로 한암 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3년여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 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탄허 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 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화엄론』40 권,『육조단경』,『보조 법어』,『사교』,『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 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 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혜거(惠居), 무비(無比) 등 제 자들이 중심이 돼 불사한 탄허기념박물관이 강남구 자곡동에 11월 개관한다.


회향은 끝이 아니라 시작

오대산은 5개의 봉우리가 연꽃처럼 펼쳐진 산이다. 호령봉, 비로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을 하루 만에 주파해야 산악인으로 인정받는다. 노인봉까지 섭렵하면 최고 중의 최고다. 불자들 사이에선 월정사와 상원사에서만 참배해서는 안되고 5대, 즉 중 대 사자암 적멸보궁, 북대 미륵암, 남대 지장암, 서대 수정암, 동대 관음암을 모두 참배해야 비로소 불자이고 오대산의 보살들 을 다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적멸보궁과 서대 수정암은 다리품을 팔아야 갈 수 있으니 만만치 않다. 상원사는 월정사에 서 서북쪽으로 9㎞ 떨어진,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산내 암자이긴 하지만 신라의 보천, 효명 태자와 조선 의 세조 임금이 관련되어 역사적인 내력이 깊은 사찰이다.



이곳의 청량선원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원으로 성가가 높아 본 래의 참면목을 깨우치려는 수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은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이 높다.

디자인에 조예가 깊은 주지 인광(印廣) 스님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 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가 어떤 종과도 비교될 데 없는 상원사 동종 소리가 오대산 자락에 울려 퍼지는 장엄한 광 경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대 미륵암은 걸어서는 2시간, 차로는 20분 걸리는 상왕봉 정상 부근에 자리한 다. 멀리서 보면 코끼리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상두암이라고도 한다. 과거 나한도량으로 명맥을 이어왔으며 나옹 선사의 일화가 전해진다.

덕행(德行) 스님의 낭랑한 독경 소리가 좋고, 두로봉과 동대산의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는 운치가 깊다. 서대 수정암 은 가장 아름다운 산내 암자다. 암자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너와집만 달랑 있는데 지금은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토굴처로 이용되고 있다.

암자 인근에 한강의 발원지인 우통수(于筒水)가 있는데, 빛깔과 맛이 특이하며 무게도 보통 물보다 무겁다. 남 대 지장암은 기린선원이 있는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감원 정안(晶岸) 스님의 상호가 맑고 단아하다.

10년 정도 동안은 있지만 정안 스님은 20년 이상이어서 같이 간 사진장이가 연신 찬사를 쏟아냈다. 최근 오대산 월정사의 최대 관심은 빼앗겼던 『조선왕 실의궤』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의 귀환이다.

일본이 2006년 반환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문화재청이 3년간 서울대 규장각에 임시 보관하고 3년 후 소장처를 결정하겠다고 했으나 현재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이 강제병 합 100주년을 맞아 반환키로 한 의궤도 제자리에 돌아오도록 기원하고 있다.

회향이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 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깨달음을 얻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화중생을 통해 더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깨달음이 정지가 아니라 역사가 돼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지금 더 큰 시작의 출발점에 서 있다.


글·장인석 경희대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월간 CEO』, 『트래블 앤 컬처』, 『비틀맵』 편집장 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1996년 엘캐피탄과 1998년 매킨리산을 등정했다.

사진·이종승 서강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저서로는 『이토록 행복한 하루』가 있다.


◎ 인터뷰 - 월정사 주시 퇴우 정념 스님

“절은 산중에 안주하지 않고 중생에게 다가가야 한다”

정념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개혁주의자다. 절집이 그 자리에서 안주했다가는 중생으로부터 멀어지고 발전이 없다는 생각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한다. 그는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오대산 월정사부터 대폭 바꿨고 그 노력은 놀라운 결실을 맺고 있다.

매스컴의 단골 메뉴가 된 단기출가학교는 수행 공간을 도심에 옮긴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행과 세속을 하나로 묶 어 중생이 절과 도량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게 된 동인이 되었다. 100여 명의 대중은 단기출가학교라는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속세를 배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대산 천년 숲길 걷기대회,’‘산사 영화제,’‘청소년 스키캠프’등 지역사회 로 다가가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시도됐다. 지역 중학교 인성교육에도 나서 호응을 얻고 있다. 정념 스님은 지역공동체 복원과 청소년 가치관 확립에 대한 확고한 해법을 쥐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수많은 정보지식이 결국 자기 소외와 자기 상실감을 가져 다주고 있습니다. 서로 더 많이 듣고, 보고, 담으려 하는 문화 구조 속에서는 악순환만 거듭될 뿐입니다. 수행은 쌓은 것을 덜어 내고 가진 것을 비우는 것이 요체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덜고 비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이 진정으로 평온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고통의 근원을 알아서 그 고통을 덜어내면 대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하는 정념 스님은 “어디서나 주인된 삶을 살면 집착, 자기소외, 고통의 존재도 능히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교 사관학교’인 중앙승가대학을 나온 스님은 1980년 만화 스님을 은사로 수계한 후 승가학원 감사, 11·12·13대 중앙종회의원, 상원사 주지를 역임하고, 강원불교연합 회 회장, 종립학교관리위원, 중앙승가대학 총동문회장, 문수청소년회 총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예불 후 108배를 올린 다음 『원각경』을 독경하고 대중과 함께하는 발우공양을 엄수한다. 이것이 그가 ‘지역과 함께, 시대와 호흡하 는 불교’ 에너지 원천이 되고 있다.

한국 불교가 비빔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으로 늘 깨어 있는 사고를 견지하고 있는 정 념 스님은 전통 위의 새로운 불교문화타운을 건립하겠다는 발원으로 하루하루가 늘 바쁘고 신선하다.

댓글목록

단출26기 인지님의 댓글

단출26기 인지 작성일

글을 읽으면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습니다
그곳에 계시는분중 한분은 분명 미륵보살님 이라고...
늘 월정사 소식 앉아서 볼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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