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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_주간조선][인터뷰] 불교에 빠진 우명규 전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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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단기출가학교 작성일10-05-06 16:24 조회8,4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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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불교에 빠진 우명규 전 서울시장
영하 17도 혹한에도 10시간 삼보일배 “왜 사서 고생?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수련해 놓은 게 얼마 없어 드러낼 게 없다.” “그럴 입장도 못 된다.” 첫 번째 전화에서 그는 이렇게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며칠 뒤 두 번째 통화에서 “불경을 읽고 정리한 게 대학노트로 30권이 넘는다는데 그게 왜 아무것도 아니냐”고 설득했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기자가 다시 “그러면 노트를 어떻게 정리했는지 보고 싶으니 노트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하자, 그제서야 그는 “그럼 차나 한잔 마시자”고 한발 물러섰다.

우명규(禹命奎·73)씨. 1962년 경북 칠곡군 건설과장으로 공직을 시작해 서울시지하철건설본부장, 서울시부시장, 경북지사, 서울시장 등을 지낸 인물. 기자는 서울시장을 지낸 전직 의원과 저녁식사 자리에서 우명규씨가 불교 공부에 심취해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와 함께 우명규씨가 오대산 월정사에서 단기 출가(出家) 학교를 마쳤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난 5월 4일 오전 서울 서초동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이 환갑을 넘겨 불자 수련에 빠진 사람의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편하게 살지 그는 왜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라는 등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씨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초대면이었지만 그는 깊은 산사에서 만난 승려처럼 얼굴색이 맑고 투명했다. 그의 왼쪽 손목에 묵주가 보였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단기 출가 학교’를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월정사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단기 출가학교를 개최합니다. 출가한 스님과 똑같은 과정을 밟는 것이지요. 수련 과정이 고되기 때문에 입학원서를 내면 심사해 합격자를 통보합니다. 경쟁률이 평균 5 대 1이 넘는다고 합디다. 월정사 측은 합격자에 한해 종합건강진단서를 가져오게 해요. 그만큼 수행 과정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2008년 7월 1일 시작해 7월23일에 끝나는 17기(期) 학교에 참가했어요.”

단기 출가학교 17기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64명. 남녀가 각각 32명씩이었다. 연령대는 20~30대가 주류를 이뤘다. 그중에서 우씨가 최고령자였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번 들어가면 일절 세속과는 인연이 끊어집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절에서 지급하는 똑같은 옷을 입습니다. 전화연락도 할 수 없지요. 필기도구, 비누, 치약 등도 똑같은 걸 씁니다.”

▲ 불교TV는 지난해 8월 단기 출가 학교 전과정을 방영했다. 삭발한 우씨가 합장하고 있다.
입교한 모든 사람이 삭발을 합니까. “남자는 전원 삭발을 해야 합니다. 여자는 희망자에 한해 삭발을 하게 해요. 우리 기(期)에서는 9명이 삭발을 합디다.”

둘째 날부터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다음날부터 새벽 3시30분 기상해 저녁 9시에 취침할 때까지 조금도 쉬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둘째 날 월정사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약 1.5㎞ 거리를 삼보일배(三步一拜) 했지요. 17일째 되는 날은 상원사에서 중대(中臺) 적멸보궁까지 삼보일배를 했어요. 마지막날에는 밤 9시부터 7시간 동안 3000배를 했습니다.”

단기 출가 코스에 들어간 걸 후회하지 않으셨나요. “며칠 뒤 너무 힘들어 후회한 적도 있어요. 열흘쯤 되었을 때 아내가 꿈자리가 어수선하다며 면회를 왔습니다. 하지만 면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4시간 기다려 5~6m 거리에서 문틈으로 잠깐 얼굴만 봤지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빨리 가라’고만 했어요. 만일 면회 사실이 알려지면 단체기합을 받게 되니까요.”

단기코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떤 때였나요. “유언장을 쓰는 시간이 있었어요. 힘든 수행과정을 거의 마친 뒤 유언장을 쓰는데 사람을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만들데요. 지나고 나니까 그때 내가 잘 견뎠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우씨의 불자 수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2008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도 월정사에서 있은 ‘기쁨의 새해맞이’ 행사에 참가했다. 이날 오대산의 수은주는 영하 17도까지 떨어졌다. 이날 350명의 참가자는 오후 1시부터 세 그룹(삼보일배, 염불 보행, 지원팀)으로 나눠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8.8㎞ 구간을 걷는 행사에 참여했다. 우씨는 삼보일배 그룹에 들어갔다. 삼보일배를 택한 그룹 중에서 중간 중간 힘에 겨워 탈락하는 사람도 나왔다.

“저녁 6시쯤 돼서 중간 지점에 도착해 식사를 했습니다. 밥그릇 들고 가면 밥을 한 주걱 퍼주고 그 위에 국을 부어주는 식이었죠. 길가에서 덜덜 떨면서 먹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이었어요. 우리가 ‘반찬 없다’ ‘밥맛 없다’ 하는 얘기는 다 배 부르니까 하는 말이에요.”

여름에 삼보일배로 상원사까지 올라가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을 텐데요. “밤 11시 반에 도착했어요.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때의 희열이 이런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데요. 상원사에서 주는 떡국 한 그릇씩 먹은 뒤에 제야의 종을 한 번씩 치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올 때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지요.”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언제입니까. “2002년부터죠. 8년 됐어요. 그 전까지 그냥 절에 다닌 수준이었죠.”

편히 사시지 왜 사서 고생하십니까. “나이 먹으니까 철이 든 거죠.(웃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때문입니다. 생자필멸 회자정리라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깨달음을 얻은 도인들의 생각은 다 똑같아요.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한 겁니다.”

고위직을 지낸 사람들 중에는 친구들과 골프 치고 해외여행 다니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요. “그런 사람이 있죠. ‘나이 먹어서 골프나 치면서 즐기다 가지 뭐하러…’ 하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나이에 심심하다,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요. 나는 한 달 내내 지루하다고 생각할 때가 한순간도 없어요. 앞으로 공부할 게 얼마나 많은데 언제 지루함을 느끼겠어요.”

▲ 우명규씨 서가에 꽂혀있는 노트들.
하루 스케줄을 소개해 주십시오. “작년 1월 1일부터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108배를 하고 있습니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오고 있어요. 그리곤 헬스클럽에 가 6시 반부터 1시간 동안 국선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 와 아침을 먹죠. 나이 70을 넘겨 힘든 출가 코스 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체력단련을 해놓았기 때문이죠. 안 그랬으면 그거 못해요.”

우씨는 매주 화·목요일 오후 남부순환도로 변에 있는 무상사에서 참선 시간을 갖는다. 매주 화요일 오전에는 성북동 동방대학교 대학원에 나가 윤무학 교수로부터 ‘노자 도덕경’을 공부한다. 월요일 아침 국선도 수련 시간에 앞서 그는 동료 회원들에게 ‘일일일구(一日一句)’를 강의한다. 매주 주말에는 강남영풍문고에 나가 불교 관련 신간을 찾는다.

“매일 일기를 쓰고 또 금전출납부를 써왔습니다. 1000원 이상 쓴 것을 매일 기록하는 거, 그거 쉽지 않아요. 또 매일 읽은 책 중에서 좋은 구절을 일기장에 적고 있는데 일일일구는 그중에서 하나를 발췌해 원문과 해설을 붙여 A4 용지에 정리한 것입니다. 2006년 11월 6일(월요일) 시작해 단 한 주도 쉬지 않았습니다. 주로 논어, 채근담, 도덕경, 명심보감, 큰스님법문 등에서 뽑아서 정리하죠.”

‘일일일구’ 강의는 2008년 12월 15일로 100회를 맞았다. 그는 이를 기념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글귀’라는 제목의 100쪽짜리 책자 두 권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돌렸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은 일상생활에서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그는 멍하니 있는 법이 없다. 수첩을 펴고 삼조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과 경허스님의 ‘참선곡’을 읽고 또 읽는다. 수첩에는 ‘매일 실천해야 할 일 6가지’와 ‘생활수칙 5가지’가 적혀 있다. 생활수칙 5가지 중 첫 번째인 ‘화내지 않는다’가 눈길을 끌었다.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100% 지키진 못합니다. 하지만 지키려고 노력하는 생활과 그렇지 않은 생활과는 분명 다릅니다.”

살면서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나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누가 안 좋은 말을 하면 안 들은 걸로 하면 되지요.”

우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기자의 취재수첩에 신라 선덕왕 때 부설(浮雪)거사의 임종게(臨終偈)를 적어주었다.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分別是非都放下/ 但看心佛自歸依

(눈으로 보되 보는 바가 따로 없으니 분별이 없고/ 귀로 듣되 듣는 바가 따로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도다/ 분별과 시비를 다 놓아버리고/ 다만 마음 부처를 보아 스스로 귀의할 뿐이로다)

우씨는 동아대 토목공학과를 나와 기술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칠곡군·안동시·포항시·대구시를 거치며 능력을 인정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그는 도시계획과장, 서울시지하철본부 건설과장, 도로과장, 하수국장 등 도시 인프라 관련 부서를 모두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지방대 출신으로 명문대 출신을 이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주경야독 끝에 그는 서울대 조경학 석사와 중앙대 토목공학 박사를 받게 된다.

테크노크라트로서의 전성기는 1979년 지하철건설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1993년 서울시 부시장이 되기 전까지 지하철건설본부가 해체된 기간을 빼놓고 장장 9년5개월을 맡았다.

불운은 정무직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관선 경북지사로 나가 민선 지사를 준비하고 있던 1994년 10월, 그만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 붕괴사건 직후 서울시장에 임명되었으나 그 역시 불과 열흘 만에 물러나는 불운을 겪었다.

서울시장에서 물러났을 때 좌절을 극복하기 힘드셨죠. “(이 질문에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곤 끊었다는 담배를 꺼내 한 대를 다 피우고는 입을 뗐다.) 그 전까지는 기술직 공무원으로서 너무 순탄하게 승승장구했어요. 건축직·토목직은 상대적으로 징계를 많이 받지요. 하지만 내 인사 기록 카드에는 징계 기록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플러스가 아니었던 거야. 내가 풍파를 겪으며 그 자리에까지 올라갔다면 ‘이 정도 시련쯤이야’하고 견뎌냈을 텐데. 순조롭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니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 월정사 ‘단기 출가 학교’에 참여해 삼보일배를 하는 수련생들. / photo 불교TV
사표 낸 것을 후회하셨군요. “한때 후회했죠. 버티면 됐을 텐데 왜 사표를 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의 불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6년 16대 총선에 현직 의원을 물리치고 신한국당 공천을 따냈지만 자민련 후보에게 낙선한다. 재기를 위한 도전이 꺾이고 만 것이다.

예상치 못한 낙선이었죠. “너무 자신만만한 결과였습니다. 선거 경험이 없다 보니…. 구청장 같은 자리를 해봤으면 밑바닥 정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을 텐데. 풍파를 겪었어야 했는데 기술직만을 했기 때문에 세상을 너무 좋게 봤어, 순수하게 봤어요.”

1년 뒤 의성에서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지만 이번에는 공천에서 탈락하고 만다. 승승장구하던 테크노크라트는 정치의 세계에 들어서자마자 연거푸 세 번 좌절을 맛봤다.

화병이 날 만도 한데 어떻게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까. “내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시골(의성군 단북면)에서 자라서 서울시부시장, 경북지사, 서울시장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며 탁 털어버렸어요. 더 욕심 내면 끝이 없다고 생각했죠. 이제부터는 인생공부를 시작하기로 한 겁니다.”

세 번의 좌절이 불교 공부에 빠지는 데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겠군요.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거예요.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생에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시기는 지하철건설본부장 할 때였겠군요. “그래요. 가끔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 생각이 들어요. ‘그때 지하철을 만들지 않았으면 이 인구가 다 지상으로 움직일 텐데… 그럼 어떻게 되지?’ 지하철 건설 하나는 잘했다고 자부합니다. 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정직하게 일했지요. 그땐 본부장이 구간별로 건설회사에 다 맡겼어. 돈 안 먹으니 아무런 뒷말이 없는 것 아니오.”

그에게 불교 공부를 한 노트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집은 방배동에 있는데 재개발 중이어서 현재는 서초역 근처에 임시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다. 그의 서재에는 조경학, 토목공학 등 공학 관련 서적이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불교 관련 서적이 431권이나 있었다. 그는 “전화 받고 다시 세어보니 대학노트가 꼭 50권이 되데요”라며 웃었다. 대학노트를 한 장씩 넘겨보면서 그의 공부가 보통 수준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생에 선근(善根)을 닦은 게 없어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가장 좋아하는 선시(禪詩)는 어떤 게 있나요.  “많이 들어봤을 거요. 고려 공민왕 때 왕사(王師) 나옹선사가 지은 선시가 있어요. 나옹선사는 무학대사의 스승입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선시를 읊조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바다는 나를 보고 청경히 살라 하고, 대지는 나를 보고 원만히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그의 해설이 이어졌다.


▲ 우명규씨의 수첩에 적혀있는 불경 글귀.
“이 선시는 자연이 우리에게 스승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말해줘요. 큰스님의 법문도 물론 좋지만….”

만난 지 3시간이 지났을 때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불경 구절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기자의 취재수첩에 세 구절을 적어주었다. 그중 세 번째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고려말 야운(野雲) 비구가 쓴 자경문(自警文)에 있는 글이다.

‘萬般將 不去이나 唯有業隨身이니, 三日修心은 千載寶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라’

(어떤 것도 저승길을 동행하지 못하지만 생전에 지은 업만은 따라가나니. 사흘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물이요, 백 년을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티끌이니라)

/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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