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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경사] 하늘아래 첫 동네서 마주한 心象 (1월26일-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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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1-31 10:07 조회6,0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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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빌라바투를 멸망시키려고 군대를 일으킨 코살라국의 비두다바 왕이 국경을 넘다 부처를 발견했다. 부처는 잎이라고는 없는 마른나무 밑에 앉아 뜨거운 햇볕을 견디고 있었다. 비두다바는 말을 몰아 부처에게로 다가갔다.

“잎이 무성한 니그로다 나무도 있는데 왜 마른나무 밑에 계시지요?”
“친족의 그늘만큼 시원한 그늘이 어디 있겠소.”

부처의 말뜻은 카필라 성을 공격하여 당신의 친족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말을 절실하게 전하려 그늘이 없는 마른나무 아래 일인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비두다바는 부처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처의 나라 카필라바투를 무너뜨리고 사카족의 씨를 말렸다고 <증일아함경>은 전한다.

부처의 시대처럼 전쟁이 나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른바 가족 해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부처의 시대보다 훨씬 마른나무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조만간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가족해체의 시대단상
강추위의 겨울과 같아
태백산 사찰서 본 희망
봄소식처럼 전하고 싶어

 

  
장군봉의 기울어진 주목.

우울한 시대상황 속에 태백시 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흐린 창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버스가 정선 고개 1,000m를 넘을 때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놀랍게도 햇빛이 구름을 열고 나타나서 창문에 어른거렸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태백시 터미널에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유일사 매표소로 내려서자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눈에 보이는 풍경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무들 사이를 쏘다니는 안개도 믿을 수 없었다.

유일사 가는 일반버스를 갈아타기 전 나는 터미널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시켜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보리차로 입을 헹구면서 나는 물으나 마나 한 소리를 식당주인에게 건넸다.

“여기선 보슬비 내렸다 말았다 하는데 태백산엔 눈이 오겠죠?”

식당주인은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걸 어찌 알겠드래요. 태백산 마음 아니겠드래요?”

식당주인 말이 맞다. 태백산은 제 힘만으로 날씨를 다스리기에는 너무 큰 산이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황지연못을 품었고, 함백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과 봉우리들을 거느렸다. 17.44㎢의 면적으로 198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그토록 큰 산인데도 등산객들이 쉬이 태백산 등정에 나서는 까닭은 뭘까. 높되 험하지 않고, 크되 그 품이 아늑한 까닭이다. 유일사에서 오르는 길은 8분 능선의 완만한 언덕이므로 등산 초보라 할지라도 그다지 힘들지 않다. 출발지점이 이미 해발 890m라서 정상인 장군봉(1567m)의 반은 접고 들어가는 셈이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에 눈은 정강이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보드득 보드득. 아이젠을 찬 발에서 오돌뼈 씹는 소리가 난다. 겨울 안개가 짙어 등산객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두런두런 곁을 지났다. 새벽에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사람인가보다. 눈뭉텅이가 안개를 뚫고 난데없이 툭툭 떨어졌다. ‘유일사 100M’. 유일사를 가리키는 아라비아 숫자는 이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의 한귀퉁이에서 나타났다.

  
눈과 얼음, 안개로 뒤덮인 유일사 무량수전.

 

유일사로 내려서는 계단은 길고 구불구불했고 계단의 끝은 안개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얼음이 박힌 계단에 조심스레 발을 내려놓기를 몇 분이 지났을까. 흐린 간유리 너머의 세상, 비구니 스님만 상주한다는 유일사가 보였다. 태백산의 음지에 속하는 골짜기라 절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고, 무량수전 앞마당은 온통 빙판이었다. 나는 얼음으로 지은 집인 양 보이는 무량수전 앞에 서 있을 뿐, 감히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안에 금색 불상이 있고 촛불이 타오르고 있으리란, 그 흔한 상상도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빙판 위에 서서 머리만 조아려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내려왔던 계단길을 다시 올라가 동토의 절에서 빠져나왔다. 산등성이에 올라붙는 길에서 나는 방금 들른 유일사를 생각했다. 왠지 꽃 피는 봄에 들러야만 비구니 스님들에게서 겨우 절의 유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입대하는 장정처럼 나는 훗날을 기약했다.

태백산의 명물인 주목이 하나둘 보이더니 우르르 무리를 이룬다. 나는 장군봉 아래 주목 군락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눈더미를 받치고 선 주목의 뒤틀린 줄기가 힘겨워 보인다. 태백산 주목들은 겨우내 눈꽃과 상고대를 번갈아 피우는 사이 얼었다가 녹고, 녹았다가 얼기를 되풀이한다. 나무껍질은 얼다 못해 얼어 터진다. 침엽수인 주목은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고산지대에 모여 사는 한대성 식물이다. 더디게 성장하는 대신 목질이 단단해서 옛사람들은 주목을 잘라 병장기의 재료로 사용했다. 죽어서도 여간해서는 썩지 않아,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경구를 만들어낸 나무이다.

바람이 불자 잣나무, 졸참나무, 분비나무들이 진저리를 쳐 풀풀 눈을 털어낸다. 반면에 주목은 바늘잎이 촘촘히 뒤덮인 나뭇가지를 두어 번 뒤채여 뭉텅뭉텅 눈을 털어낸다. 그러나 장군봉이 가까운 길에는 유독 죽은 주목이 많았다. 하늘로 뻗은 고사목의 부러진 가지가 더 뾰족하고 메말라 보였다. 바람이 거세졌고 안개의 이동속도도 빨라졌다.

내가 걷는 길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태백산을 감싼 안개도 여기 와서는 하얗게 얼어 죽을 판이었다.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의 나무들은 이미 죽었거나 겨우 살아있었다. 그 나무들이 쿠시나가르의 언덕을 오르는 부처 일행을 먼발치서 조심스레 바라보는 말라족 같았다. 모두 지독히도 가난한 백성이거나 사람 취급이라곤 받아본 적 없는 불가촉천민들이었다.

 

  

하늘과 땅의 뜻을 소통했던 천제단.

태백산 정상에는 제단이 세 군데나 있다. 상단 격인 장군봉 제단과 중단격인 천제단, 그리고 하단으로 이뤄졌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와 고려 때도 이들 제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 불교는 토속신앙과 습합하여 절에 산신각을 두니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도 제사는 끊이지 않았다. 나라가 잘 되는 일이라면 산신령이든 단군이든 단종의 원혼이든 모셔다가 술과 과일과 돼지머리를 바쳤다. 대한제국의 항일의병장 신돌석은 백마를 잡아다 바쳤다. 지금도 이들 제단 곁을 지나면 무당임을 금세 알 수 있는 이들이 소망을 입에 담아 주절거리고, 등산객들은 물론 대학교 다니는 여학생까지도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있다.

 

하단 주변은 비교적 바람이 잔잔한 평지이다. 하단에서부터 당골로 가는 길과 문수봉 가는 길로 갈리고, 문수봉 가는 길은 백두대간 가는 길과 갈린다. 나는 망경사(望鏡寺)가 있는 당골길을 선택했다.

망경사를 처음 안 건 20여 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몇몇 친구들과 태백산에서 해맞이할 요량으로 밤기차를 탔다. 유일사 앞에서 랜턴을 켜고 단숨에 장군봉에 올랐으나 어둠은 고드름처럼 꽁꽁 뭉쳐 있었고, 해는 동해바다의 두꺼운 이불 아래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밤새 천제단 곁에서 발을 구르며 동트는 하늘을 바라봤지만 기대했던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하산길에서 만난 망경사는 태백산 새벽바람에 움츠러든 누추한 암자에 지나지 않았다. 가난한 집 밥그릇을 닮은 전각 두어 채뿐이었다. 비구니인지 공양주 보살인지 알 수 없는 중년 여인이 우리를 대접하려고 나무를 때서 아침밥을 준비했다.

지금은 대웅전, 용정각, 범종각, 요사채, 객사 등 제법 절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망경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다. 하늘 아래 첫 절이라는 지리산 법계사나 설악산 봉정암, 치악산 상원사보다 높다. 망경사 경내에 있는 용정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이다. 그만큼 접근성이 떨어졌으나 등산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새로 조성한 문수보살 석상과 석탑은 번영을 누리는 망경사의 현주소이다.

망경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법사가 창건했다. 정암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자장이 문수보살 석상이 땅속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지은 절이 망경사이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데 있는 절인 만큼 달을 맨 먼저 본다 하여 망월사라 부르기도 했다. 달을 거울로 비유한 것은 해묵은 비유이거니와, 거울에 비친 마음의 실상을 보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가족 해체의 마른나무가 우리 사회의 풍경화일 때 거울을 보는 마음은 겨울과 같지 않겠는가. 곧 봄이 온다. 그때 나는 나와 내 가족, 내 모든 주변을 봄꽃처럼 피어나게 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봄이 오면 꽃피는 언덕길을 걸어 유일사에 들를 것이다.

 

 

기사원문보기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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