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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사자암] 오대산 중대사자암(법보신문)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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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11-11 10:05 조회8,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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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오대산 중대사자암
오대산 4대가 읍하며 경배하니, 화엄세계 예서 펼쳐지네
김택근 wtk222@hanmail.net
   
 
▲ 사자암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중대 풍로산에 자리 잡았다. 지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진신사리가 적멸보궁에 봉안되고 이곳에서는 수많은 일화들이 생겨나고 소멸했다. 10월20일 촬영.

가을 끝에서 차를 탔다. 북으로 달릴수록 산색이 묽어지더니 오대산 속은 이미 겨울이었다. 중대사자암(감원 해량 스님)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길, 상원사 쯤에서 마음을 꺼내봤다. 설레는 마음을 경건하자고 다독였다. 사람들은 적멸보궁을 불국토 오대산의 심장으로 여긴다. 하지만 왠지 오대산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상원사 옆길을 따라가니 키 큰 전나무와 잣나무가 어디 가느냐고 묻고 있었다. 수백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 밑동에는 온통 구멍 자국이다. 새들은 늙은 나무에 부리를 박아 무엇을 가져갔을까. 나무들은 그저 제 몸을 내주고 있었다.


당나라 오대산 갔던 자장율사
문수석상 앞서 7일 동안 기도
문수보살 나타나 게송 전달해
귀국 후 강원도 오대산 찾아가
진신사리를 적멸보궁에 봉안

신라 태자 보천·효명 형제도
각각 중대·북대 초암서 정진
조선 초 중창 후 왕실 내원당
명종 대에 이르러 승영사찰로
한암·일타 등 선사 발길 이어져


길은 홀연 산 위로 이어졌다. 잎 떨군 나무들은 고요했다. 해발 1000미터가 넘었지만 햇살은 따스했다. 다람쥐들이 여기저기서 햇살을 굴리고 있다. 문득 산 속 동물들의 겨우살이 준비가 궁금했다. 쉬엄쉬엄 오르는데도 숨이 차다. 이윽고 다층석탑을 연상시키는 계단식 5층 절집이 나타났다. 중대사자암이다. 오대산의 5대(臺)를 상징하여 지었다고 한다.

   
 
▲ 비로봉을 중심으로 솟아오른 오대산 다섯 봉우리는 그대로 사자암 다섯 지붕이 됐다.

백두대간의 중심 오대산은 둥글면서 후덕하다. 이웃한 설악이 골산(骨山)임에 반해 오대산은 육산(肉山)이다. 비로봉(1563m)을 중심으로 5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고 봉우리 사이로 중대, 동대, 서대, 남대, 북대 등 5개의 평평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높지만 고원이 있기에 그 품이 넉넉하다. 중대를 중심으로 봉우리가 원을 그리고 있어 흡사 연꽃을 연상시킨다.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이 계신 오대산은 봉우리마다 골짜기마다 불연(佛緣)이 스며있는 성지이다.

   
 
▲ 감원 해량 스님은 적멸보궁에서 깨친 하심을 산 밑 마을 겨울나기 돌봄으로 회향하고 있다.

사자암에서 바라보는 오대산은 깊으면서도 온화했다. 그래서 보이는 곳 모두가 경내였다. 감원 해량 스님은 오대산에 들면 업장이 녹아내리기에 그 안의 생명붙이들도 화해롭게 공존한다고 했다. 상극 관계인 다람쥐와 청설모가 인사를 나누고, 비둘기와 까마귀의 날갯짓이 평화롭다고 한다.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서 흘러나온 가피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 오대산에 갔던 신라 자장율사는 왜 이곳까지 와서 사리를 모셨을까.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태화지(太和池) 옆 문수석상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했더니 홀연 대성(大聖)이 네 구절의 게(偈)를 일러줌으로 깨어서 기억해 보았으나 모두 범어라서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한 승려가 비단 금점 가사 한 벌, 바리때 한 벌, 불두골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에게 와서 “어찌하여 무료하게 앉아 있느냐”고 물었다. 법사는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송이 범어라 그 뜻을 알 수 없어 그렇다고 말했다. 이에 승려가 “가라파좌낭은 일체 법을 안다는 말이고, 달예다가야는 자성(自性)이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이고, 낭가사가낭은 이렇게 법성을 안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는 곧 노사나불을 본다는 말이다”며 풀이해 주었다. 승려는 가사 등을 주며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께서 쓰시던 도구이니 잘 간직하라” 하고 또 이르되 “네 본국 동방의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어 1만의 문수가 상주하고 있으니 찾아가 보아라” 하고는 홀연 사라졌다. 법사가 두루 영적이 있는 곳을 심방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태화지를 지나오는데 못에서 용이 나타나 재를 올려달라 청하여 7일을 공양하고는 말하기를 “전에 게송을 전하던 노승이 바로 문수의 진신입니다”고 말했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신라로 돌아온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과 닮은 산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강원도 오대산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뵈었다. 다섯 봉우리가 평평한 대지(臺地)인 오대산은 그렇게 성지가 되었다.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적멸보궁에 모셨다.

불심이 깊었던 신라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도 오대산에 숨어 들었다. 형은 중대의 남쪽 진여원(지금의 상원사) 터 아래에, 아우는 북대의 남쪽 산 아래에 초암을 짓고 정진했다. 형제가 정성을 다해 5대에 나아가 공경하니 5만 부처가 나타났다며 ‘삼국유사’는 또 이렇게 전하고 있다.

‘푸른빛은 동대의 만월 모양의 산에 있어 관음의 진신 1만이 상주하고, 붉은 빛은 남대 기린 모양 산에 있어 8대 보살이 상수가 되어 1만 지장보살이 상주하고, 흰빛은 서대의 장령산인데 무량수 여래가 상수가 되어 1만 대세지보살이 상주하고, 검은 빛은 북대 상왕산을 맡았는데 석가여래가 상수가 되어 500 대아라한이 상주하며, 누런빛은 중대 풍로산에 있으니 비로자나가 상수가 되어 1만의 문수가 상주하고, 진여원지에는 문수 대성이 날마다 새벽에 36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중대에는 문수보살이 계시니 사자암을 세움이 당연했을 것이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니시기 때문이다. 중대사자암은 조선 태종 1400년 11월 중창되었으며 이후 왕실의 내원당이었다. 명종 때에는 승영사찰이었다가 1646년 중수되었다. 1878년 고쳐지었고, 요사채 향각(香閣)이 낡아 정념 스님(오대산 월정사 주지)의 발원으로 불사가 이뤄져 2006년 오늘의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법당인 비로전은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문수와 보현이 협시보살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중대사자암에서 다시 적멸보궁을 향해 걸었다. 계단을 오르고 오르면 마침내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적멸보궁은 단아하고 그윽했다. 보궁의 자리는 막 승천하려는 용의 정수리 부분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도 이곳을 본 후 감탄했다고 한다.

   
 
▲ 적멸보궁 자리는 막 승천하려는 용의 정수리 부분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알려졌다.

“승려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살며 편히 남의 공양만 받아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둘도 없는 명당에 조상(부처)을 모셨으니 후손(승려)이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사리를 모신(643년 추정) 이후 1370년이 지났으니 얼마나 많은 일화들이 생겨나고 또 소멸했을 것인가. 여기에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등장한다. 주원장이 자신의 유택을 마련하려 5명의 지관에게 명당을 찾으라 명했다. 지관들은 중국 각지를 뒤졌지만 명당을 찾지 못하고 조선까지 넘어왔다. 조선 산야를 뒤지던 지관들은 오대산 적멸보궁 터를 발견하고는 숨을 죽였다. 산세를 살피며 왕에게 바칠 지형도를 그리던 5명은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 적멸보궁은 일개 왕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라 대웅(大雄)이 머물 곳이기 때문에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누구도 화를 면치 못한다는 얘기다.  
   
 
▲ 진신사리 봉안 후 수많은 구도자들이 중대사자암에서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이 길을 걸었다.

적멸보궁은 구도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27년 동안 동구불출했던 오대산의 전설 한암 스님은 상원사에 주석하며 매일 적멸보궁을 찾았고, 일타 스님은 손가락을 태워 소신공양을 올렸다. 그들뿐이겠는가. 천 년 동안 고승들은 험한 산길을 올라 답을 달라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선승들의 발길이 부쩍 줄어들었다고 한다. 해량 스님은 그것이 우리 불교의 진짜 위기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보궁에는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다. 부처님 사리는 어느 곳에 모셔져 있는지 알 수 없다. 정골사리이기 때문에 땅 속 깊숙이 묻혀있을 거라 추정할 뿐이다. 적멸보궁 뒤 쪽 봉분에는 5층탑을 양각으로 새겨 넣은 84㎝ 높이의 마애불탑이 서 있다. 모양이 초라해서 더 비범했다. 탑 뒤편 사리가 묻혀있을 법한 곳에 작은 바위들이 편하게 놓여있다. 거기에는 어떤 수식도 없다. 대체 자장율사는 어디에 사리를 모셨을까.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니 홀연 먼 풍경들이 달려들었다. 가슴이 열렸다. 4대(臺)가 적멸보궁을 향해 읍하고 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다.

‘이런 풍경이,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멀리 산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산 뒤에 산, 그 뒤에 또 산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아득한 곳에서 산과 하늘이 만나고 있었다. 실로 화엄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이었다. 그리고 그 산들이 이 작은 언덕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장율사는 저 화엄의 세계를 보라고 사리를 숨겼는지도 모른다. 오대산 전체가 사리이며 봉우리가 불탑인 것일 깨우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한 후에는 꼭 돌아서서 장엄한 산세를 살펴보기 바란다. 신성(神性)이 깃든 자연은 그대로 큰 가르침이었다.

다시 중대사자암으로 내려서자 절집이 문수보살의 사자처럼 듬직하다. 적멸보궁을 지키는 중대사자암이 있고, 그 속에는 중대사자암을 지키는 감원 해량 스님이 있다. 스님은 사자암에 와서야 하심(下心)의 본뜻을 깨쳤다고 한다. 하심은 들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문수보살께서 눈을 다시 뜨게 했으니, 기도를 올리면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와 마냥 행복하다고 했다.
“이곳에서 천일 넘게 기도하니 상(相)이 줄어들고, 지혜를 얻으니 이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지혜와 평화를 나눠주려 자주 산을 내려갑니다.”

해량 스님이 찾아가는 곳은 산 밑 마을 요양원과 독거노인들이다. 철야기도에서 우러난 발원을 대중들과 함께 실천하고 있다. 요즘은 쌀과 김치를 들고 찾아가 그들의 겨울나기를 돌보고 있다. 중대사자암 식구들은 부처님의 가피를 싣고 산을 내려간다. 얻은 것을 나누는 일, 그것이 문수보살의 사자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김택근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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