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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 정선 정암사의 수마노탑(법보신문) 2014.06.24 > 작은 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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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 정선 정암사의 수마노탑(법보신문) 201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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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6-26 10:04 조회7,4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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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선 정암사의 수마노탑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가피로 진신사리 봉안한 모전석탑
신대현 박사  buam0915@hanmail.net
   
▲ 신라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 수마노탑.

우리 사찰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사찰을 창건한 창건주에 관한 것인데,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무려 200개 가까운 사찰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효(元曉, 617~686) 스님은 그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150곳 정도 사찰의 창건주로 나온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원효와 의상 두 성현이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기 때문일 것이다.

두 스님이 활동한 연대가 7세기인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가장 진지하고 열성적인 시대로, 한마디로 우리 불교의 황금기가 아닌가 한다. 불교미술 면으로 불상이나 불탑을 보더라도 이때를 전후해 그 수가 급증하고 있고, 예술적 성취도 함께 이룬 시대였다. 그런데 이런 황금기의 기틀이 잡힌 때는 이보다 한 세대 앞선 자장(慈藏, 590~658) 스님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자장 스님 배타고 귀국할 때
용왕이 숭모해 마노석 공양

진신사리 봉안할 곳 못 찾자
문수보살에게 지극정성 기도

칡넝쿨 내려와 일러준 곳에
마노석 탑 세우고 사리 봉안

1972년 해체 때 사리구 발견
역사적 진실 담은 설화 확인

자장 스님 역시 100곳 가까운 절의 창건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 중국에 가서 선진 불교학을 수입해온 점이 아닐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계가 질과 양 면에서 몇 차원 도약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여러 고승을 만나 그들의 선진 교학을 익혀 643년에 돌아와 우리나라 불교가 성숙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진신사리 100과와 석가모니의 금란가사까지도 모셔왔다. 이는 부처님의 법이 우리나라까지 온 것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당시 신라의 지성계(知性界)를 들썩이게 했을 사건이자 문화 발전에 기여한 ‘벼락같은 축복’이었을 것이다. 이 진신사리 100과는 사리 하나하나가 바로 부처님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계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자긍심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장 스님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뛰어오르는 바탕을 마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강원도 정선 태백산 줄기에 자리한 정암사(淨巖寺)는 이런 자장 스님의 체취가 고스란히 밴 곳이다. 자장 스님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할 뿐 아니라 자장 스님이 가져온 불사리가 봉안된 수마노탑도 있다.

수마노탑은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를 벗어난 지역으로는 가장 처음으로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탑이라는 면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 그 말고도 우리나라에서 전하는 여러 종류의 건탑(建塔) 전설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하는 탑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강원도의 보배 같은 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정암사는 과연 어떤 인연으로 창건되었을까? 처음 이름은 갈래사(葛來寺)인데, ‘갈래사사적기’에 그 창건담이 전한다. 자장 스님이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자”라고 했다. 자장은 계시라고 여기고 일어나자마자 그곳에 갔다. 그런데 꿈에서 본 이승 대신에 문득 문수보살이 모습을 보이더니, “태백산에 있는 갈반지(葛盤地)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했다. 문수보살을 만나고 다시 만날 약속까지 했으니 그만한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갈반지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갈반지’란 곧 ‘칡덩굴이 자리 잡은 곳’을 뜻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수소문 해봐도 그런 지명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태백산으로 들어가 찾아봤지만 역시 여러 날 동안 허탕만 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산 깊은 곳에서 여기저기 헤매다가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몇 백 년은 묵었을 오래 된 칡넝쿨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곳이 꿈속에서 들은 ‘갈반지’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이어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다시 말하면 문수보살이 정암사의 절터를 점지해 준 것이다.

창건에 관한 또 다른 설도 있다.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 스님은 자신이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다가 지금의 자리인 고현읍 사북리 불소(佛沼) 위 산꼭대기가 적소임을 깨닫고 여기에 탑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때가 겨울철이라 그런지 탑을 세울 때마다 얼마안가 무너지곤 했다. 설상가상 폭설까지 내렸다. 그는 탑 세우기를 멈추고 절실하게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던 날 밤, 어디선가 칡 세 줄기가 나타나 땅 위에 하얗게 내린 눈 위로 뻗어가더니 지금의 수마노탑·적멸보궁 그리고 정암사 터로 각각 가서 멈추었다. 자장 스님은 기도에 따른 응답이라 여겨 가장 먼저 칡이 뻗은 자리에는 탑을 세우고 나머지 두 자리에는 적멸보궁과 전각을 세웠다. 절 이름은 ‘갈래사(칡이 뻗어 내려와 점지한 절)’라 했고, 금대봉과 은대봉에도 각각 탑 하나씩을 세웠다.

지금까지 말한 전설의 핵심을 잘 간추려 보면,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의 영험에 힘입어 갈래사를 창건했고, 수마노탑·금탑·은탑 등 탑 세 기를 같이 세웠는데 여기에는 그가 모셔온 진신사리가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전설은 늘 신비와 초자연적 현상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것을 걷어내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핵심엔 늘 역사적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와, 이야기로 전하는 역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야기로 전하는 역사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신비로 감싸여 있기 마련인데, 그래야 기록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을 것 같다.

정암사와 수마노탑 전설에서도 그런 전설의 풋풋한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금대봉의 금탑과 은대봉의 은탑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은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설이지만, 결국 세속의 욕심을 버릴 수 없는 우리는 이 금탑·은탑은 평생 볼 수 없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 같아 아쉽다. 여하튼 지금은 수마노탑만 전하지만 그래도 이 탑을 통해 우리 불교사에 묻어 둔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음은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창건담과는 정반대로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을 또다시 친견할 기회를 맞고도 날려 보냈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자장 스님이 어언 신라 불교의 원로가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그 옛날 지장 스님이 중국에 있을 때 그에게 진신사리를 전해주었고 또 나중에 정암사 절터까지 점지해준 문수보살이 이번에는 초라한 차림의 거사로 모습을 바꾼 다음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미 세속에 물들어버린 자장 스님은 이 초췌한 늙은이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 거사는 “자장이 아상(我相)이 심하구나!” 라고 일갈하고는 본래 모습대로 변하고 떠나갔다. 자장 스님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는 “아차!” 했다. 뒤늦게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곧바로 달려 나왔지만 이미 문수보살은 아랑곳없이 뒷모습만 보인 채 멀어져가고 있었다. 고갯마루까지 달려갔으나 더 이상 따라갈 수 없게 된 자장 스님은 그저 고개에 서서 망연히 자책만 할 뿐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자장 같은 고승이 아상 때문에 문수보살을 뵐 기회를 놓쳤다는 건 놀랄 일이다. 따지고 보면 고승이나 중생이나 모두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지 않는다면 헛것으로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탑 이름이 ‘수마노탑(水瑪瑙塔)’이라고 된 까닭은 무얼까? 이에 대해서도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서 배 타고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스님을 숭모하는 마음에 마노석(瑪瑙石)을 바쳤다. 스님은 남해를 돌아 동해 울진포로 상륙했고, 그 뒤 정암사를 창건하면서 이 마노를 탑에 봉안했다. 이에 ‘물길을 따라 싣고 온 마노석을 봉안한 탑’이라 뜻으로 ‘물 수(水)’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1653년에 다시 수마노탑에 봉안된 사리장엄.

이런 전설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돌려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17세기 기록에도 그대로 나온다. 1972년에 이 탑을 수리할 때 5매의 탑지석(塔誌石, 탑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석판)이 나왔는데 그 중 1653년에 기록된 것에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다음처럼 적혀 있는 것이다.

“(경주에서) 바닷가를 따라 이곳으로 온 자장 스님이 천의봉(天倚峰) 아래서 세 갈반지[三葛盤地]를 발견했다. 이에 용왕으로부터 받은 수마노를 탑에 봉안했다. 이어서 탑 아래에 향화(香火)를 올릴 수 있도록 건물 하나를 세우고 ‘정암(淨巖)’이라고 편액을 달았다(大師邀入是山天倚峰下神三葛盤之地以龍王所獻水瑪瑚立塔奉安塔下造香火一所以定巖扁之云而).”

이 글은 자장 스님이 정암사를 창건했고, 중국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수마노를 봉안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알려준다. 그리고 ‘탑 아래 향화를 올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란 곧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물론 여러 번 중건되었겠지만) 적멸보궁이라고 추정해도 될 것 같다.

   
▲ 정암사 적멸보궁.

정암사에서 바라보면 북쪽 언덕에 자리한 수마노탑이 보인다. 높이 9미터, 우리나라 탑치고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탑이 지닌 의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높이나 크기로 판단할 일이 아님은 앞에서 말한 전설에서 이미 배웠다. 특이한 것은 모전(模塼, 돌을 벽돌모양으로 새긴 것) 석탑이라는 점이다. 초층 옥신 중앙에 감실(龕室) 모양의 사각형 틀이 설치되었고, 그 중앙에 철제 문고리가 달려 있다. 1972년의 해체수리과정에서 앞서 말한 탑지석 5매와, 청동 합(盒)·은 외합(外盒)·금 외합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런 유물을 통해 이 탑이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자장 스님이 전하려한 진리도 이 탑과 함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가!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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