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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투데이] 삼국통일 후 화합·통합·소통을 염원한 삼화사(三和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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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9-10-23 16:11 조회3,3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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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가 선덕여왕의 “급거 귀국하라!”라는 왕명을 받고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로 가기 전에 고구려 땅인 삼척에 이런저런 방편을 폈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불교 신앙을 통해 강력한 국가 정신을 수립함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신라를 수호하고 고구려, 백제와의 긴장 관계에 대응하고자 당나라에 유학 중인 자장율사를 불러들여 경주에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고, 고구려 접경지역인 강원도 오대산을 중심으로 불교 성역화 추진에 나선 것이다. 
 

이처럼 삼화사는 선덕여왕이 오대산 성역화를 추진하는 것과 궤를 같이해 창건됐다. 결국, 삼화사는 불교 신앙을 통한 국가 정신의 수립이라고 하는 호국사찰의 성격을 띠고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화사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頭陀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삼화사의 옛 명칭은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했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 왔다고 한다.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 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인 석주(石舟)를 타고 와,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게 각각 머물렀다.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다녔는데 그 용이 변해 바위가 됐고,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1393년 태조2년)가 칙령을 내려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여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되었다는 뜻)로 고치라 했다"라고 한다.  


경내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 시대의 탑이다. 

삼성각 안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철불(鐵佛)이 있는데 그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 150여자를 지난 1997년 판독한 결과 이 철불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명문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한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결언(決言) 등의 스님과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당시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조선왕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5대 규장각 외에 비밀스러운 실록을 보관했던 곳도 이곳 비(秘) 규장각을 봉안한 삼화사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의병 3000여명이 비 규장각을 수호하고 있었으나 외아들을 둔 보살이 왜군의 회유와 협박에 아들이 있는 곳을 누설하는 바람에 외규장각을 지키던 아들과 함께 3000여명의 의병이 왜군들에게 전멸당하고, 그 뒤로 ‘피가 마를 날이 없는 피마루골이라 불렀다’라는 말이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지난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현 관음암은 원래는 범일 국사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해서 지조암이었으나 몽중가피 사연을 체험한 당시 스님이 관음암으로 중창했다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삼화사 인근 청년이 산에 가서 약초를 캐 연명을 해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해 “나는 어느 때에나 장가 한번 가보나 …” 하고 장탄식하다 암자를 지날 때마다 부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장가 한번 가게 해달라!”고. 어느 날 약초꾼 꿈에 어느 스님이 "네가 약초를 장에 가서 팔 때 아픈 사람이 약초를 구하거든 돈을 받지 말고 주거라"라고 했다고 한다. 같은 날 인근 동네 처녀도 아버지가 병환에 몸져누워 백약이 무효여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 건강을 회복시킬까 하고 약탕기를 다리다 잠시 조는 사이 꿈에 스님이 나타나 “장에 가면 아버지를 낫게 할 약초가 있으니 그걸 구해 다려드리면 나을 것이다"라는 꿈에서 깨어 장에 가니 어느 청년이 약초를 팔고 있었다고 한다. 하여 꿈에서 알려준 대로 약초를 사고 돈을 청년에게 주려고 하니, 청년이 “그냥 가져가시라”라면서 “난 산에 가면 얼마든지 캘 수 있으니 이 약초가 필요할 사정이 있을 것 같은 그대가 가져가라”라며 선뜻 내줬다고 한다. 그 처녀 보살은 청년이 준 약초를 달여 아버지에게 드린 이후 아버지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고, 이 모두가 꿈속에서 스님이 말한 대로 이뤄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그 청년이 천년 인연으로 여겨 결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또 삼성각 철불과 관련된 꿈속 현몽에 따르면 어느 날 한 골동품장사가 찾아와 철불을 팔라고 했지만, 부처님을 골동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골동품상은 스님 몰래 철불을 훔쳐 가마니에 싸서 묵호로 도망쳤다. 이때 당시 묵호에 주재하고 있던 어떤 기자의 꿈에 가마니에 싸인 철불이 보였다. 그는 꿈속의 일이 신기해 역으로 나갔더니 과연 가마니가 보였다. 기자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화물을 맡긴 사람이 차비를 구하러 갔다고 귀띔했다. 기자는 경찰에 연락해서 철불을 지키고 있던 고물상의 아내를 조사하게 했더니 훔친 것으로 판명, 이 철불은 다시 삼화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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