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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가장 난폭했던 시간 나는 ‘침묵’으로 버텼고 山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4월14일-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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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4-17 08:42 조회7,0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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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이 우거진 강원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 신달자 시인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위태로웠던 어느 해 겨울날, 오대산으로 ‘침묵피정’의 길을 떠났다. 박경일 기자 park@

 

 

 

74 ‘침묵피정’ 신달자 시인의 오대산 

참을성 있는 사람의 눈물은 물이 아니라 불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으로 타오르는 불이다. 운명이란 간섭할수록 더 사나워져서 ‘인내’와 ‘순응’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는 인간의 감성 그 ‘참을성’은 그래서 서서히 내 것이 되어 가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 생의 터가 조금씩 ‘참을성’으로 넓어져 갈 때 나는 생의 겸허를 배우기 시작하고 대들기보다 순하게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운명은 나의 스승이다. 삶의 폭력 앞에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내밀기까지는 조금 오래 걸렸다. 허공 안에서도 툭툭 부딪치는 벽이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다는 신호일 것이다. 실지로 머리는 더 작아졌겠지만 느낌은 건물 하나를 이고 있는 무게감이 위태로운 어느 날 나는 현실의 막중한 중심을 벗어났다. 겨울 새벽 5시 나는 홀로 시동을 걸었다. 영하 12도, 체감온도는 20도였다. 나는 말이 없는 세계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도도하고 깜깜한 겨울 새벽어둠을 짓이기며 자동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속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쏟으면 멍울멍울 핏덩이라도 내리쏟아질 것 같은 꽉 찬 노여움? 화? 자기 존재의 부정? 뭐 그런 것들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듯했다.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자동차가 영동고속도로를 진입하고도 어둠은 계속되었다. 오직 나를 비우고 나를 만나는 ‘침묵’이 과제이므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오로지 그날의 일이었다. 모든 것은 잊어버리자. 조금씩 멀어지는 현실의 복잡한 일들을 차창의 겨울 풍경들이 씻어주고 있었다. 서서히 차창이 붉게 열리고 먼발치로 동이 터 오를 때 ‘진부’라는 안내판이 나오면서 벌써 오대산 바람이 불어 왔고 가슴이 뛰었다. 차창 너머로 산들이 지나가고 다시 산들이 지나갔다. 저렇게 산들이 지나가는 것처럼 생의 통증도 지나갈 것이다. 살다 보면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저고리를 만들어 입혀주는 순간이나 아기를 낳아 처음 얼굴을 보는 순간들은 눈물겹도록 좋아서 결코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고 싶어도 시간은 덤을 주는 일이 없지 않았는가. 고통의 시간도 그러하리라는 것은 참으로 큰 선물이었으리라. 

진부의 진입로를 들어서고 월정사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도 아침 고요로 예불을 드리고 있는 듯했다. 아무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홀로 들어서는 길이다. 나는 자동차를 세웠다. 문을 여니 쏴 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여기가 어딘가? 냉기가 도는 바람은 이내 얼굴과 손을 굳게 했다. 시간은 아직 이르다. 자 지금부터다. 나는 오대산 선재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스스로 택한 죽음 같은 것이었다. 월정사를 지나 일주문을 지나 동티골을 지나 상원사까지 내게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이 악물고 걸어갔다. 이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의 선택을 하려는 듯 살벌하고도 독(毒)오른 악기(惡氣)의 선택이 푹푹 쌓인 눈길의 오르막을 걷고 있었다. 얼음 바람이 털모자를 두르고도 남은 얼굴을 때려왔다. 그렇다. 나는 마치 얼음 속을 걷고 있는 듯 하얀 눈을 뒤집어쓴 산과 나무들 그리고 꽝꽝 언 계곡뿐인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마치 운명과 이마를 맞대고 싸우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래 그것은 싸움이었다. 이것보다 더 지독한 자신과의 싸움은 없을 듯했다. 아, 그 겨울. 



침묵피정은 모든 소지품을 내려놓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가볍게 먹는 일만 하는 일이었다. 절대로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말이 없는 세계는 그 시절 나에겐 황홀한 매력이 있었다. 말이 없으니 안이 더 넓어지고 식욕도 훨씬 줄어들었다. 인간세계에 대한 욕망(죄업)은 놀랄 만큼 사라졌다. 말한다는 것, 이것이 식욕처럼 얼마나 인간의 욕망을 키우는지를 나는 놀랍게 알았다. 입은 사라지고 귀와 정신은 커졌던 것이다.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 놓고 걸었다 

한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서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드리고 싶다. 

- ‘침묵피정 1’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했던가. 여기서 병(病)을 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만 없으면 그래도 삶이란 그런대로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병의 시간은 사람에 따라 너무 길고 추악하기까지 하다. 자존심을 있는 대로 박살 내기도 하는 것. 

어머니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내가 울부짖어도 떠나셨다. 젊은 60대였다. 나의 사회적 성공으로 자신의 한을 풀어 보고자 했지만 어머니는 나의 절망만 보고 눈 감으셨다. 

아버지는 88세에 눈감으셨지만 갖은 굴곡의 세월을 사셨다. 건강, 경제력, 그런대로 사회적 지위도 있었지만 다 잃고 병만 얻어 노인병원에서 오래 머무셨다. 쓸모없는 짐 덩어리를 외딴곳에 던져 놓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 죄책감을 벗기 위해 자주 병원을 들락거렸다. 시간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잠잘 시간을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했었다. 그것으로 죄의식이 벗겨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세 겹 네 겹으로 얽힌 내 적나라한 생활에서 아버지의 일은 강 너머 불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서른다섯, 막내가 두 살일 때 남편이 쓰러졌고 내 생은 곤두박질했다. 생의 지진이었다. 지반이 쫘아악 갈라졌다. 23일 만에 죽음에서 깨어났지만 완전한 회복은 암담했고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에서 병원으로 병원 냄새는 100년이 갈 듯했다. 운명을 등에 업고 가슴엔 신(神)을 품었다. 처음엔 따지고 대들고 악다구니를 쓰다가 이내 순응했다. 

너무 낯설고 수치스러운 가장(家長)이라는 말을 이빨로 지근지근 씹어 삼켰다. 이것저것 일을 해 보기도 했지만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소위 ‘산문’이라는 걸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돈이 되기도 했다. 병원 화장실에서 불편한 자세로 손가락이 비틀어질 정도로 많이 썼다.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쓰러진 그 자리에서 9년을 누워계시다 90세에 눈을 감으셨다. 1991년의 일이다. 대형 환자가 둘이나 있는 우리 집은 꽃을 꽂아도 이내 시들어 버릴 정도로 어둡고 싸늘했다.

인간의 삶이 반드시 비극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에 깔려 죽는 사람도 있지만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생의 대혁신을 일으켰다. 여자에게 가장 힘센 이름은 엄마라는 명예일 것이다. 내 딸들이 사춘기를 넘어 청춘이 되고 사랑을 하고 가정을 만들 때 엄마가 힘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더 큰 자기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은 나 스스로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때 ‘엄마’라는 의무와 명예를 자각시켰을 것이다. 그것은 공부였다. 그때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은 대학 졸업장이었다. 공부를 잇는 일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수익성 높은 투자라고 나는 생각했다. 현재는 빈털터리지만 그 재산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꿈이며 목표였던 것이다. 

돈 버는 일이 아니라 돈을 써야 하는 일에는 큰 무리가 따랐지만 나는 견디는 일에 잘 적응했다. 투박한 나무껍질을 연한 잎으로 비집고 나오는 봄 눈엽(嫩葉)을 내 안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의 내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굴욕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철칙이었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했고 드디어 문학박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교수가 되었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겐 실오라기 하나에 기대어 하늘을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결코 나 개인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운명의 힘이었고 하늘의 허락이었다. 남편은 2000년에 눈을 감았고 24년의 투병생활에 50번 이상 입원했었다. 



겨울산으로 내 마흔의 그림자 끌고 

불현듯 찾아간 

내 어머니 산소 

한차례 센 바람이 가지를 부러뜨리고 

어머니를 부르는 내 쉰 목소리도 

둔하게 부러져 찬바람이 되었다 

- ‘겨울성묘’  



어머니 산소를 참 많이도 찾아갔다. 자신을 이길 수 없을 때, 공격을 받을 때,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어머니를 찾았지만 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간 것은 내가 책값으로 돈을 받았을 때, 문학박사 증서를 받았을 때, 교수가 되었을 때였다. 그만큼 어머니가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무덤 앞에 수표 몇 장을 묻으면서 나는 하늘을 우러르며 감사 기도를 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라는 형용사 안에는 기복이 심한 난폭한 시간으로 꽉 차 있었지만 나는 그 생활을 침묵했다고 말한다. 집에서 생활인으로 왕왕 소리 지르고 학교에서 강의하고 강의실 밖에서 몇 백 명을 앞에 놓고 외쳤지만 나는 침묵했다고 그 지난 생활을 회고한다. 지금 북촌 공일당 책상 앞에서 지난 세월을 한마디로 침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개인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세월 속에 나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도, 여자도, 나약한 어리광도 없었던 것이다. 어느 젊은 날 인사동에서 백자 등잔 하나 사 집안 구석에 던져두었다가 10년이 훨씬 넘어 우연히 보게 됐다. 왜 울컥했을까. 아, 거기 침묵하고 있는 실체는 나의 본능이었을까. 까맣게 잊어진 ‘여자’라는 그 이름이었을까.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등잔’ 

신달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시인 

 

 

기사원문보기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4140103311204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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