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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선림원지 ‘정원20년명 종’ (4월10일-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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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4-10 15:28 조회7,261회 댓글0건

본문

1948년 설악산서 발견

국군이 월정사 소각시 소실

상원사 동종과 정반대 운명

종신 안쪽 양각 명문 ‘독특’

9세기 귀중한 금석문 자료 

①1948년에 발견된 선림원지 정원(貞元) 20년(年) 범종. 정원 20년은 804년이다. 총고 122㎝, 종신고 96㎝, 구경 68㎝이다.

일본에 남아있는 운쥬지(雲樹寺) 종이 거의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9세기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통일신라 범종이 바로 804년에 만들어진 선림원지(禪林院址) 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범종은 1948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서면(西面) 미천리(米川里) 소재의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이후 불과 3년만에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만 비운의 종이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이 종을 발견한 장소가 설악산의 폐사지였기 때문에 종의 안전한 보호를 위하여 오대산의 대찰 월정사 종각에 이 종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6.25가 발발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퇴각하던 1951년 1.4 후퇴 무렵(1월 3일, 또는 4일 전후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월정사에서도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월정사가 북한군의 은신처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절을 불태웠고 이 때 선림원지 종도 불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전쟁의 폭격도 아닌 국군에 의해 자행된 이러한 만행은 두고두고 문화재 파손의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원사 역시 그 당시 같이 방화될 운명이었으나 목숨을 걸고 이를 막은 한암선사의 살신성인이 있었기에 상원사 국보 종은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선림원지 종이 발견될 당시의 전언에 따르면 종은 지하 60㎝ 정도의 깊이에 옆으로 뉘인 채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목탄을 넣어 매납(묻어서 보관)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 몰라도 이 종을 보호하고자 인위적으로 묻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의 원래 총고는 122㎝, 구경은 68㎝로서 통일신라 종 가운데는 크지 않은 중형에 속하는 편이다. 

현재는 그 잔편들만 국립춘천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으며 이 잔편과 원 도면을 참조하여 국립춘천박물관에 복원 전시되었다. 특히 이 범종은 다른 종과 달리 범종의 종신 안쪽에 양각의 명문을 새겨 넣었음이 독특하다. 상원사 종은 종의 천판(天板)에 음각시켰고 성덕대왕 신종은 종신 몸체 가장 중심에 1000여자의 명문을 양각으로 새겼다. 그에 반하여 선림원지 종만이 외부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명문을 새긴 것은 번잡한 명문이 오히려 범종의 미감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감안한 의도적인 배려로 보인다. 앞으로 우리도 현대의 범종을 제작하는데 있어 꼭 참고 할 부분이다. 

기록된 명문은 ‘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鍾成內之, 古尸山郡仁近大紫草里 施賜乎(?)古鍾, 金二百八十廷뎠寺古鍾金二百卄廷此以, 木爲內十方旦越勸爲成內在之, 願旨是者法界有情皆佛道中到內去誓內, 時寺聞賜主信寅(?)夫人君, 上坐 令妙寺 日照和上, 時司 元恩師, 鍾成在佰士 當寺 覺智士, 上和上 順應和上, 良惠師, 平法師, 善覺師, 如住(?)師, 牛誓師, 宜司 쟉覺師, 節唯乃 同說師’ 이다. 

첫 행은 ‘정원이십년(貞元卄年) 통일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인 804년 갑신년 3월20일에 당사(當寺)에서 완성한 종’이란 내용이다. 당사는 바로 이 종이 발견된 곳인 선림원지이지만 홍각선사(弘覺禪師) 비문에 보이는 ‘선사가 60세(873년)에 다시 설악산(雪山)의 억성사(億聖寺)에 주석(主席)했다’는 내용을 통해 억성사가 바로 선림원(禪林院)이라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다음 행의 ‘인근대말(仁近大)’의 인근과 ‘자초리(紫草里)’는 인명이며 ‘시사호(施賜乎(?))’는 시주(施主)하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대마말의 직분을 가진 인근과 자초리가 고종(古鍾) 이백팔십정(二百八十廷)을 시주하였다’는 내용이다. 

②복원된 선림원지 종.

다음 줄은 ‘시방의 단월(旦越, 시주자)이 노력하고 성취하여 법계의 불도에 도달하기를 서원(誓願)한 때’로 해석된다. 다음 행의 ‘사문사주신인부인군(寺聞賜主信寅夫人君)’은 ‘절에서 듣고 하사(下賜)한 분은 신인부인(信寅夫人)이다’라는 의미이고 그 다음부터 마지막의 인명들은 주로 종 제작과 관련된 인명들을 나열하였다. 첫줄의 ‘상좌 영묘사 일조화상(上坐 令妙寺 日照和上)’과 ‘시사(時司) 원은사(元恩師)’는 주종에 관련된 감독들이며 ‘종성재백사(鍾成在佰士)’는 성덕대왕 신종에 기록된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 차박사(次博士)’와 마찬가지로 종 주조에 관계된 기술자로 보인다. 다음 행의 ‘상화상 순응화상(上和上 順應和上)’은 해인사(海印寺) 개창(開倉)과 관련되어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절유내(節唯乃)’의 절은 이두로서 ‘그 때’라는 의미로서 유내는 상원사종에도 보이는 ‘유나(維那)’와 같은 표현으로서 여기에 기록된 스님들 역시 주종 감독자(鑄鐘 監督者)로 추측된다. 

이 종의 실물은 파손이 심하여 세부를 볼 수 없지만 남아있는 사진과 실측 도면을 통해 대체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우선 이 범종은 8세기 통일신라 종에 비해 그 크기가 현격히 줄어들면서 종신의 외형이 세장하게 보이는 것이 9세기에 들어온 새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 

역동감 없이 어딘지 느슨해진 용뉴는 목이 가늘며 뒤에 붙은 음통은 3단으로 구분되어 연판문을 장식하였고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에는 아무런 문양이 시문되지 않았다. 상대에는 당좌를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반원형 원권문(圓圈文)을 하단에 붙여 반복 배치하고 그 외구와 여백 면에는 당초문을 촘촘히 시문하였다. 

③국군이 퇴각하면서 월정사를 불태울 때 함께 소실된 선림원지 종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故 황수영 박사.

하대에는 불좌상(佛坐像)을 연이어 배치한 구조로서 상원사종, 일본의 운쥬지종(雲樹寺鐘)과 같은 8세기 종의 문양을 따르고 있지만 약간의 도식화가 엿보이기 시작하였다. 연곽에는 상대의 문양과 동일한 반원권의 연화 보상화문이 장식되었고 연곽 안에 장식된 9개씩의 연뢰(蓮잎)는 그다지 높게 돌출되지 않았다. 앞 시기의 통일신라 범종에 비해 종신의 하대에서 훨씬 위로 올라온 곳에 2개의 당좌가 배치되었다. 당좌는 원권(圓圈)을 3구로 나누어 가장 안쪽 내구에는 작은 자방 주위를 8엽의 중엽 연판문으로 둘렀으며 중구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다시 이 바깥을 복잡하게 굴곡진 당초문으로 외구를 장식한 뒤 전체를 연주문대로 두른 모습이다. 이러한 당좌 문양은 상원사종보다는 힘이 빠진 듯 조금 느슨하게 보이지만 장식적인 화려함이 강조되었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종신 앞, 뒷면에는 당좌와 거의 같은 높이로 연곽 바로 아래 배치된 2구 1조의 주악상이 부조되었다. 몸 뒤로 피어오른 구름 위에 놓인 연화좌에 앉아 횡적과 요고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상원사종, 운수사종에 보이는 정면관의 무릎을 꿇은 궤좌형(뱌座形) 주악상에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구름 위에 별도로 추가된 연화좌의 표현도 새로운 요소라 할 수 있다. 머리 뒤로 굴곡을 이루며 부드럽게 흩날리는 천의 자락도 훨씬 간략화 되었으나 고부조 된 주악상의 얼굴과 신체의 모델링은 아직까지 생동감을 잃지 않았다. 

이 종은 통일신라 804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관직명과 이두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비록 완형은 아니지만 통일신라 9세기 초의 편년자료로서 중요하다. 여기에 원래 종의 용뉴에 달았던 당시의 철제 고리가 함께 발견되어 남아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해준다. 

 ▶여음(餘音)

1948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우연히 그 모습을 드러낸 선림원지 종은 해방 이후 최고의 발견이라고까지 여겨졌지만 불과 3년만에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차라리 이때 발견되지 않고 후대에 세상에 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선림원지 종이 지녔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사진으로 밖에 확인할 길이 없지만 국립춘천박물관의 한켠에 불에 타 갈라진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한번 파손된 문화재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주듯이! 

 

 

기사원문보기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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