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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강원인물]탄허가 말했다, 결단하고 승려가 됐으면 공부에 충실해야 한다(강원일보)2013.7.11. > 언론에 비친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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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강원인물]탄허가 말했다, 결단하고 승려가 됐으면 공부에 충실해야 한다(강원일보)201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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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7-11 09:01 조회3,2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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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강원인물]탄허가 말했다, 결단하고 승려가 됐으면 공부에 충실해야 한다
 `화엄이 곧 탄허이고 탄허는 곧 화엄' - 소설가 김도연

1934년 나이 22세에

'道란 무엇인가' 찾아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와…

석달만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석달이 3년 되고, 20여년 머물러

'금강산'기신론'범망경'…

입산 후 6·25전쟁 나기 전까지

한암스님 모시고 불경 공부 매진


우수한 인재 양성 취지로

수도원 만들고 교재로 쓰기 위해

본격적으로 '신화엄경합론'잡고

10년만에 6만3천여매 번역

한국불교 교육의 토대 세워

불교의 혼란기며 나라의 과도기

교육 통한 계몽 절실한 시대

특히 화엄경에 매달렸던 이유


"법당 100채 짓는 것보다

스님들 공부시키는 게 더 중요

공부하지 않고는 불경의 의미

제대로 깨달을 수 없지요

여름벌레에게

얼음 이야기 할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얘기 할 수 없지요

또 못난 선비에게

道 얘기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스님들을 공부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이것은 1934년 나이 22세에 `도란 무엇인가?'를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해 한암(漢岩) 스님에게서 계를 받은 탄허(呑虛) 스님이 1966년(54세) 동국역경원 개원식에서 한 말이다. 이 한 마디 말이 여전히 현재형인 채 어쩌면 이 땅의 불교와 우리의 미래가 모두 여기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탄허의 발자국을 더듬더듬 좇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미리 고백하건대 오대산 입구에서 태어나 살아온 나 역시 염불보다 잿밥, 일주문을 통해 나온 법문보다 수챗구멍으로 흘러나온 이야기에 더 코를 벌름거렸던 한심한 중생일 뿐이니. 돌돌( )!


입산 전, 유학의 전 과정을 마친 탄허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 심취했다. 그러나 사회에는 노장의 세계를 가르쳐줄 선생이 없어 긍긍하다가 오대산에 한암이라는 도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3년간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오대산으로 들어오게 된다. 처음엔 3개월만 공부를 할 생각이었는데 3개월이 3년이 되고 결국 스님이 되어 한암 스님 아래에서 20여 년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를 일러줄 스승을 찾아 산에 들어왔다가 그만 물이 들어버린 것이다. 화엄(華嚴)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절에 들어온 뒤 처음 3, 4년간은 일체 경전이나 문자를 보지 않았다. 그것은 선방의 당연한 관례이고 선방에 온 사람으로서 당연한 자세였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자 우리 스님인 한암 노화상께서 나에게 도가 문자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아는 사람은 일단 경을 봐야 한다고 몇 번인가 권하셨다. 스님께서는 내가 문자에 빠질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모양이다.' 이때부터 탄허는 불경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때마침 1936년 오대산 상원사에는 `강원도 삼본산 승려연합수련소'가 생기고 탄허는 스승 한암의 조교가 되어 `금강경' `기신론' `범망경' 등등을 가르치고 배우며 불교의 경전들을 섭렵하게 된다. 그 세월이 7년이었는데 그로 인해 불교사상에 정통하고 유불선(儒佛禪)의 서로 달라 보이는 가지들을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기반까지 갖추게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숭유억불의 조선을 지나온 불교는 또 다른 시련과 맞닥뜨려 있었다. 이 땅의 전통불교와 일본불교(대표적으로 대처승 제도)의 부딪침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광복이 되고나서도 분란의 불씨가 되었는데 오대산도 마찬가지였다. 사찰의 소유권 문제 등등을 놓고 비구승과 대처승과의 긴 싸움은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치지 않았는데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단적인 해결(불교정화운동)로 점입가경의 상태로 접어든다.


탄허는 입산 후 전쟁이 나기 전까지 15년 동안 오대산에서 한암 스님을 모시고 각종 불경 공부에 매진했다. 한암 스님은 전쟁 중 오대산 상원사를 지키고 열반한다. 월정사는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만 남기고 나머지는 폐허가 되었다. 1955년 월정사 조실에 추대된 탄허는 다음해 월정사에 `대한불교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설립한다. 설립목적은 청정한 도량을 만들고 불교와 사회전반에 걸쳐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다. 입학생들은 당연히 승속을 가리지 않았다. 더불어 수도원의 교재로 쓰기 위해 본격적으로 `신화엄경합론'의 번역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쟁 뒤의 오대산 수도원은 춥고 가난했다. 대처승들과의 분쟁도 끝나지 않았다. 결국 1년여 동안 문을 열었다가 닫고 탄허는 제자들을 이끌고 삼척 영은사로 자리를 옮겨 `영은사 수도원'을 개설한다. 30년 불경번역의 장대한 역사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다.


탄허는 1967년 10년 만에 6만3,000여 매의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75년 18년 만에 불교 최고의 경전을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간행한다. 이 공로로 동아일보사 주최 `인촌문화상'을 수상한다. 선정 이유는 이렇다. `이것은 우리 불교계에 있어서 보기 드문 공전절후의 금자탑과도 같다……흔히 불교와 불경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종교이며 학문이란 말을 듣는다. 우주의 섭리와 진리를 설파하는 데 있어 직선적인 표현보다는 많은 비유와 암시가 있고 보면 여기에는 난해한 대목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바로 이를 어떻게 하면 쉬운 말로 이해시키며 또 이를 어떻게 하면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요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탄허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불교경전을 번역하는 데로 나아갔다. 입적하는 그날까지.


재미난 일화 하나가 있다. 어떤 불교학자가 탄허기념박물관 관장인 혜거 스님에게 60년대 중반 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을 할 때 방문한 성철 스님에 대해 물었다. `상량식이 지난 한참 뒤에 성철 스님이 오셨어요. 그런데 성철 스님은 방산굴에서 딱 보름간을 있었는데, 놀란 것은 그 보름 동안 두 스님이 서로 간에 한 말씀도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중들은 저 영감들이 왜 그러느냐고 그랬어요. 두 스님은 방산굴의 윗방, 아랫방을 따로따로 쓰셨어요. 공양을 가져가면 우리 스님은 우리가 갖다 주는 상을 받지만 성철 스님은 시봉이 잡수실 것을 가지고 다녔어요. 성철 스님은 당신이 잡수실 것은 직접 만들어서 해결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두 분이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탄허 스님은 성철 스님이 가신 후에 저에게 할 말이 있어야 하지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두 스님이 보름간 말을 안 한 것이 숙제였어요.' 아랫방, 윗방에 앉아 있는 불교계 두 거장의 대결이 자못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은 어느 편이 더 아름다운가? 오(悟)와 수(修)를 한순간에 모두 완성한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가,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점진적인 수행을 요구하는 돈오점수(頓梧漸修)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둘 다 아름답다고. 위와 아래가 없다고. 탄허의 스승인 한암은 선수행을 중심으로 교(敎)를 전개했다면 탄허는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선자(禪者)였다고 월정사 자현 스님은 말한다. 이는 스님의 시대가 불교의 혼란기이자, 나라의 과도기로서 교육을 통한 계몽이 가장 절실한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아마 탄허는 그러했기 때문에 어려운 불경의 번역에, 특히 화엄경에 매달렸을 것이라고 본다.

`스님들이 공부에 더욱 열중해야 합니다. 제가 수많은 불경을 번역한 것도 교재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어요.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불경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지요. 여름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얘기를 할 수 없지요(`장자'에서). 또 못난 선비에게 도를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결단하고 승려가 됐으면 공부에 충실해야 합니다.'

탄허는 70세가 되는 1982년 11월부터 1983년 2월까지 월정사에서 병환의 노구를 이끌고 화엄학 특강을 개최한다. 화엄철학은 모든 존재의 차별상을 인정하는 화해와 평등의 사상을 말한다고 한다. 현실에서 평등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립과 갈등이 더 먼저 으르렁거린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김형효는 원효의 대승철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깊고 넉넉한 연못과 바다는 어떤 물은 깨끗하니까 받아들이고 다른 물은 더러우니까 배척하는 그런 택일을 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 품안에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진정시켜 맑은 물로 정화한다. 연못과 바다는 모든 물의 차이를 다 수용하고 동거하기에 각박하게 신경질 내지 않는다. 대등주의자들은 각박하다. 그래서 매서운 눈초리와 신경질을 얼굴에 깔고 다닌다. 오직 차이와 동거하는 평등론자의 융화만이 담연하다.' 탄허는 평생 이 말을 무지한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아둔한 우리에게 있어 이 말은 얼마나 멀고먼 말이란 말인가.

1983년 음력 4월24일 탄허는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입적하기 직전 한 말씀을 구하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체 말이 없어.”

그해 겨울 폭설이 오대산을 덮었던 어느 날, 나는 월정사 전나무 숲을 무리지어 떠나가는 새들의 검은 그림자를 스님이 뱉어냈던 갖가지 예언인 것처럼 오래 들여다보았다. 돌돌!


소설가 김도연 프로필


■강원도 평창 출신(1966년)

■강원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강원일보 신춘문예(199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1996년)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

■제1회 중앙신인문학상(2000년), 제3회 허균문학작가상(2008년), 제12회 무영문학상(2012년) 수상.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십오야 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 문' `아흔 아홉', 산문집 `눈 이야기' `嶺(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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