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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의 그때 그곳]<1> 1942년 봄 경주 건천역, 박목월-조지훈의 첫 만남(동아)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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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11-13 14:46 조회8,3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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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의 그때 그곳]<1> 1942년 봄 경주 건천역, 박목월-조지훈의 첫 만남

20대 청년 시절의 박목월과 조지훈은 1942년 봄비가 내리던 경주 건천 역에서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갖는다. 행여 못 알아볼까 플래카드 들고 기다리던 목월, 말끔한 신사복 차림으로 플랫폼에 내리던 지훈, 둘의 첫 만남과 뜨거운 포옹. 휑한 플랫폼 위로 청년 시인들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경주=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지난달 18일 경북 경주시 건천역을 방문한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왼쪽)와 그를 안내한 차원현 경주대 교수. 경주=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경주를 처음 찾은 조지훈을 위해 박목월은 안내자를 자처했다. 1942년 봄 석굴암 앞의 지훈(왼쪽)과 목월. 동리목월문학관 제공

《 문학작품은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잉태되는 결실이다.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잊을 수 없는 공간과 만남들을 더듬어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는 개인과 시대의 문학세계라는, 강(江)의 발원지를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와 기자가 함께

전국을 돌며 발품을 팔았다. 먼저 청년 목월과 지훈이 처음 만났던 1942년 봄으로 시간을 돌려 경주 건천역을 찾았다. 》

일제강점기 말, 촉망받는 시인 두 명이 문단에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다. 1939년 잡지 ‘문장’을 통해 데뷔한 박목월(1916∼1978)과 이듬해 같은 잡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조지훈(1920∼1968)이었다. 당대 명망 높았던 정지용 시인은 목월을 추천하며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목월이 날 만하다”고 극찬했다.

지훈은 목월이 어떤 시인인지 궁금했지만 만날 도리가 없었다.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이 문을 닫던 때라 ‘문장’도 곧 강제 폐간됐다. 갓 등단한 지훈과 목월은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혜화전문(동국대의 전신)을 졸업한 뒤 바로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갔고, 목월은 고향 경주에 머물며 금융조합 서기 일을 했다. 누구도 이들을 시인으로 알아주지 않던 시기였다.

1941년 겨울 지훈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다른 문우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듬해 봄 지훈은 옛날 잡지에 실린 주소를 확인해 목월에게 편지를 썼다. ‘근황이 궁금하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던 지훈에게 뜻밖에도 며칠 뒤 목월의 답장이 닿았다.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지훈은 생전 처음 경주 구경도 하고, 만나고 싶었던 목월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목월도 곤궁한 생활이었지만 벽지에서 귀한 문우를 맞을 생각을 하니 설렜다.

1942년 이른 봄날 해질녘의 건천역. 하늘에서는 봄비가 분분히 흩어져 내렸다. 목월은 한지에 ‘박목월’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 들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역 구내로 들어와 멈추자, 큰 보퉁이를 머리고 이고 있는 시골 아낙네 서넛과 촌로 두엇이 플랫폼에 내렸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내려선 사내.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밤물결처럼 출렁거리던 신사. 조지훈이었다. 목월은 자기 이름을 적은 한지를 높게 흔들었다. 단박에 서로 알아본 두 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 안았다. 목월은 스물여섯, 지훈은 스물둘이었다.

암흑의 시대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건천역에서 처음 만난 뒤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되었다. 둘은 폐허의 고도 경주의 여관에서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문학과 역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지훈은 시인이라는 자기 존재를 귀히 여기는 목월이 고마웠고, 무엇보다 그가 발표할 수도 없는 시를 써 두고 있는 점이 믿음직했다. 경주를 처음 찾은 지훈을 위해 목월은 안내자를 자처했다. 석굴암을 찾으니 대숲 사이로 복사꽃이 발갛게 고개를 드러낸다. 진눈깨비가 흩날려 제법 쌀쌀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찬술에 취하여 떨고 있는 지훈을 목월은 외투로 감싸 주었다. 둘은 경주의 왕릉 사이 오솔길을 걸으며 솔밭 아래 바람 소리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훈은 열흘이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다. 지훈이 자기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목월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보내왔다. 거기에 목월을 위해 정성스레 쓴 시 한 편이 덧붙여져 있었다. ‘목월에게’란 부제가 붙은 시 ‘완화삼’이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하늘은 멀어/산새가 구슬피/울음 운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저녁 노을이여//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

지훈의 편지를 받아 들고 감격한 목월은 밤새 화답시를 준비한다. 그것이 바로 목월의 시 ‘나그네’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두 시인의 아름다운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한국 현대시의 정신적 좌표가 됐다. 건천역에서 이루어진 두 청년 시인의 만남이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꾸게 한 것이다.

지난달 중순 찾은 경주시 외곽의 건천역. 중앙선 지선의 열차가 하루 상행과 하행 각각 네 차례씩 정차한다는 작고 한적한 역이었다. 70여 년 전처럼 보따리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은 여전하지만, 그때 시인들은 간 곳이 없었다. 텅 빈 플랫폼 한 자락에서 청년 목월과 지훈의 뜨거운 포옹을 그려 보았다.

건천역에서 차로 10여 분 가면 목월이 살던 집(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471)이 있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목월은 어릴 적 이곳으로 이사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집터만 남아 있다. 2014년 말까지 복원이 이뤄질 예정이다. 집터를 둘러본 뒤 시내로 나오는 길. 농수로 옆 작은 골목길은 굽이굽이 이어졌다. 지훈을 만나기 위해 건천역으로 나왔던 청년 목월의 뒷모습이 모퉁이 끝에서 언뜻 보이는 듯했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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