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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선사 경허, 파계승 평가 안돼” (법보신문)201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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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10-19 08:06 조회2,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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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선사 경허, 파계승 평가 안돼”
■서산 천장암 회주 옹산 스님 특별기고
2012.10.18 09:53 입력 | 2012.10.18 11:45 수정

무애행 흉내 경계해야 하지만
경허 스님에 책임전가는 잘못

깨닫지 못한 범부의 관점으로
주색에 빠졌다는 비판이 ‘과오’

 

 

▲옹산 스님

 

 

서산 천장암 회주 옹산 스님이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 추모 기념탑 건립을 앞두고 최근 경허 스님의 행적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경허 큰스님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우리의 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폐불이 진행된 데다가 연이어 나라를 빼앗은 일제의 악랄한 조선불교 말살정책과 맞물려 아예 명맥이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허의 오도(悟道)는 일개인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불교 중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멈추었던 선불교의 숨결을 살려내신 분이 경허 선사다.


곪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소굴에서 피어난 한 떨기 연꽃이 바로 경허 큰스님이다. 절대 꽃이 필 수 없을 것 같았던 척박한 토양에서 발아되어 만개(滿開)한 꽃이다. 어둠속에서 홀로 불을 밝힌 경허 큰스님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같은 종찰에다 선원을 개설하셨고, 거기서 배출된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나중에 불교정화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원을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경허 큰스님은 많은 존경을 받으면서도 일각에는 무애행과 관련하여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 점에 대하여 ‘꽃밭에 누운 선승 경허’의 저자 일지(一指)는 그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질곡(桎梏)의 길을 걸어오던 한국불교의 근대적 중흥은 선불교운동에서 출발한다. 한국불교의 근대적 중흥은 구한말 불교사 사료에서 보이는 숱한 선원의 창립과 그 유지를 위한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경허는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선불교 중흥의 소임을 한 몸에 걸머진 선문의 지도자로서 선원을 창설하여 선의 등불을 밝힌 사람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조선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본 우국의 선승이었고,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다.”


한국불교가 어둠의 미망 속에 처해 있을 때 거기다가 빛을 넣어준 경허 선사를 그리스 신화에서 불을 인간에게 내준 프로메테우스에 견준 것은 적절한 표현일 듯싶다. 이제 경허가 밝힌 선화(禪火)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러기에 입멸 100주기를 맞이하여 한국불교 중흥조에 대한 추모와 그가 남긴 발자취를 찾아보는 행사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때 일각에서 경허 큰스님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가 있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인간에게 불의 사용법을 알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크게 노한 제우스는 그를 캅카스 산 바위에 묶어두고 날마다 독수리로부터 간을 쪼여 먹히게 하는 벌을 주었다. 경허 큰스님에 대한 비판은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형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과연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의 세계를 헤아려 시시비비를 가릴 안목이 있는지 의심스럽고, 미망 속을 헤매고 있는 중생이 선화(禪火)를 밝힌 초인에게 제우스 같은 형벌을 내릴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상 경허 큰스님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 비롯된 일은 아니다. 1918년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경허 스님을 음행과 투도를 끊임없이 자행한 무법자이며, 선종총림에서 마땅하게 배척되어야 할 마설(魔說)을 설한 기인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문제는 이능화가 그렇게 말한 논거가 ‘세간에서 이르는 바’ 또는 ‘세인들이 이르기를’ 그렇다고 한데 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문이 그렇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확인된 실체는 없고 무성한 소문을 수집하여 경허 큰스님을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서 불교학자 김지견(金知見)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만일 이능화가 ‘경허집’을 읽고 경허당의 제자들인 침운 현주, 혜월 혜명, 만공 월면, 한암 중원 등 네 종사들이 지닌 인품과 종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통사의 경허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술되었을 것이다. 경허당을 위해서는 물론 본방 초유의 대저인 불교사서를 집필한 이능화 자신을 위해서도 이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경허집’을 통해 본 경허의 상에는 투철한 본분 종사의 안목과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법어의 숨결에 접할지언정 그 어느 곳에도 음행 음주식용을 골자로 한 이른바 대중선을 표방하고 고취하였다고 탄핵할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경허 왜곡의 책임에 대한 일단에는 경허 입적 후 ‘경허집’이 출간되기까지 30년간 침묵한 채 적극적인 변호와 단속을 하지 않았던 덕숭산 수덕사 문중과 오대산 월정사 문중에도 있다.”


수덕 문중의 한 사람으로써 그 질책을 준엄하게 받아들이며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큰스님에게 존경과 경배를 올리는 것은 고사하고 이미 오류투성이인 것으로 밝혀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를 인용하여 비평이라는 이름하에 시정잡배에게나 쓰는 언사로 주색에 빠져있던 파계승처럼 언급하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엄중하게 항의한다.


경허 큰스님은 처절한 구도정신으로 일관하여 깨달으신 분이다. 깨달은 분의 행동은 무애행(無碍行)이다. 깨닫지 못한 범인이 무애행에다 계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오도(誤導)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은 이의 무애행을 흉내내는 것은 응당 경계해야할 과오지만 그 책임을 선각자에게 전가시킬 수는 없다. 과오는 그것을 행한 개인의 문제다.


부처님께서 불음주계를 정하신 것은 알코올이 깨달을 수 있는 지혜종자를 말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처절한 정진삼매를 통해 이미 깨달음의 경지를 증득한 후의 도인들은 그 계율에 걸릴 까닭이 없다. 원효나 진묵대사 같은 성현들이 곡차를 즐겼다고 파계 운운하는 것은 계율을 지킬 필요가 있는 중생의 편에서 보는 시각일 뿐이다. 오도한 경허 선사의 일체행동은 모두가 무애행이다. 경계가 경허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따라하는 폐단까지 경허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 조실 스님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불자 기본 5계에도 술 마시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만 술 자체에야 선악의 구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술을 먹고 난 사람이 문제지요. 술을 마셔도 과거, 현재, 미래 3세심이 술에 대한 집착을 갖거나 주정 추태를 부리는 상을 남기지 않는 무위법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이게 선이고 무념, 무상, 무주인데 분명한 것은 미오한 자의 막행막식은 타락이니 경계가 미오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여겨지면 입에 대지 말아야 할 것이고, 무념, 무상, 무주의 세계를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한테는 계율의 잣대는 더 이상 들이댈 필요가 없어요. 계율은 성불(成佛)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것인데,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듯 성불하면 그곳으로 올라오기 위해 사용하던 사다리도 집착하지 말고 버려야 하는 것이야.”


아무런 검증절차 없이 100여년을 구전돼 온 어떤 일화를 듣고서 함부로 경허를 비방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부처와 조사를 비방한 죄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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