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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 재고-전문 (법보신문)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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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9-05 09:15 조회2,3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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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 재고
        
                                                                                                                                                         윤 창 화

 Ⅰ. 경허의 주색(酒色)
 
  경허선사(鏡虛禪師, 1846-1912)는 근대 한국선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는 일대사(一大事, 깨달음의 일)에 매진했던 진정한 수행자였다. ‘오도가(悟道歌)’, ‘참선곡(參禪曲)’, ‘중노릇 하는 법’ 등 그가 남긴 글을 보면, 구도심이 간절해서 한 번에 읽어 내려가기 어렵다. 경허는 본분종사로 그야말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과제 앞에서는 발분망식(發憤忘食)했던 선승이었다.
  한편 깨달은 이후의 그의 삶과 행리(行履, 행위)는 한마디로 파격, 그것이어서 후학들에게 적지 않은 숙제를 안겨 주고 있다. 대중 앞에서 대놓고 음주식육(飮酒食肉)을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여색(女色)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긍정적으로 보면 선승의 무애행이라고 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승가의 뿌리를 뒤흔드는 계율 파괴 행위이다. 오늘날 한국 승가의 계율 의식 부재는 그의 영향이 크다. 공(功)도 크지만 과(過)도 크다. 경허의 행위 즉 주색과 관련된 일화는 매우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을 든다면 ‘해인사에서 문둥병에 걸린 여인과 여러 날 동숙(同宿)한 것’, ‘만공과 함께 길을 가다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의 입을 맞춘 것’, ‘어촌에서 머슴처럼 지내면서 남의 아낙네를 희롱한 이야기’, ‘송광사 점안식 법상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바랑에서 꺼내 삶아 오게 한 것’ 등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이며 과장인지 알 수 없다. 작가마다, 책마다 재미가 추가되고 덧붙여져서 진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법제자 한암이 쓴 필사본 『경허집』(1931년)과 선학원판 『경허집』(1943년)에는 일화는 한 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경허의 일화는 주로 잡지나 구전, 혹은 단행본  등을 통해 단편으로 전해지다가 정식으로 경허의 법어집에 수록된 것은, 1981년에 경허법어집 간행회(수덕사)에서 번역하여 간행한 『경허법어』이다. 이 책에는 약 38편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기존의 것과는 내용상 차이가 좀 있다.
  경허의 주색과 그의 비승적(非僧的) 행위에 대하여 당시 불교사학자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조선불교통사』 하권에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근세에 경허화상이라는 이가 있는데 처음에 홍주(洪州)의 천장암에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여 송광사, 선암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및 풍악(楓岳, 금강산)의 여러 사찰을 편력하면서 상당히 선풍을 드날렸다(頗揚禪風). 세상 사람들이 전하고 있는 이른바 경허의 「오도가(悟道歌)」는 장편이라서 전부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 끝 구절에 이르되,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吾家,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문득 어떤 사람으로부터 소가 되어도 코뚜레를 꿸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나의 집이었네, 6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야인이 무사 태평가를 부르네)’라고 하였다.
  세인들이 말하기를(世人謂), ‘경허화상은 변재(辯才, 말을 잘함)가 뛰어나고, 그가 설한 바 법은 비록 옛 조사(祖師)라고 할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이가 없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음행(淫行)과 투도(偸盜)를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 세상의 납자들(禪流)은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음주식육(飮酒食肉)이 깨달음과 무관하고, 행음행도(行淫行盜)가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창언(倡言)하면서, 이를 대승선(大乘禪)이라고 한다. 또 그 막행막식(無行)의 잘못을 엄폐 가장(假裝)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갔으니, 대개 이러한 폐풍은 실로 그 원형이 경허(鏡虛)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총림(叢林, 선원)에서는 이를 지목하여 마설(魔說)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 아직 감히 경허선사의 오처(悟處, 깨달은 곳)와 견처(見處, 悟處)를 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만약 불경(佛經)과 선서(禪書)에 바탕하여 이를 논한다면 곧 그 옳지 못함이 드러날 것이다.”

  준엄한 비평이다. 그런데 이능화가 ‘세인위(世人謂)’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접 경허를 만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경허의 평판 또는 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을 가지고 쓴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기록이 전부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없다. 세전위(世傳謂)는 이능화 개인의 생각이 아니고, 당시 사람들이 하는 말, 즉 평판을 바탕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의 납자들(禪流)은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음주식육이 깨달음과 무관하고, 행음행도(行淫行盜)가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창언(倡言)하면서, 이를 대승선이라고 한다. 또 그 막행막식(無行)의 잘못을 엄폐 가장(假裝)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갔으니’라는 대목은 세전위(世傳謂)가 아니고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근래 1970~1980년대에도 너도나도 경허를 흉내 내어 주색을 일삼는 납자들이 적지 않았다.
  경허의 행리(行履, 행위)에 대하여 은법제자 만공(滿空, 1871-1946)은 ‘경허법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읊다(聞鏡虛法師遷化吟)’라는 시에서, “선(善)은 부처를 능가했고, 악은 호랑이를 능가했으니, 그 분이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열반하셨으니 어디로 가셨는가? 술에 취해 꽃처럼 붉은 얼굴로 누워계시네(善惡過虎佛, 是鏡虛禪師, 遷化向甚處, 酒醉花面臥).”라고 했고, 법제자 한암(漢岩, 1876~1951)도 「경허화상행장」에서 법과 교화(法化), 그리고 행리를 열거한 다음 “선도 끝까지 이르렀고(철저했고) 악도 끝까지 이르렀다(可謂 善到底 惡到底)”고 하여 두 제자가 같은 뜻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선(善)이란 그의 법화(法化)와 깨달은 경지가 특별했음을 말하는 것이고, 악(惡)이란 바로 여색과 음주식육 등을 즐겨했던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경허는 왜 주색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남자로서 주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지만, 불승의 입장에서는 절제하거나 송구스러워해야 마땅한데, 경허화상처럼 드러내 놓고 즐겼던 이는 극히 드물다. 원효는 파계 이후 스스로 환속하여 속인으로 살았고, 임제의현의 도반 보화(普化)와 한산(寒山), 습득(拾得)은 청빈한 두타승이었지 파계를 일삼은 것은 아니다. 승단의 역사에서 경허와 같이 막행막식을 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경허가 주색을 즐겼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강건(强健)한 기질적인 바탕과 성격, 습기(習氣, 습관)가 바탕하고 있다고 보인다.
  포교사이자 경기도 화운사 강사를 지냈던 김태흡(金泰洽, 金大隱스님, 1899-1989)은  1938년 6월-1939년 1월까지 『비판(批判)』 잡지에 7회에 걸쳐 「人間 鏡虛―鏡虛大師 一代評傳」을 연재했다. 소설이 아닌 평전인데, 여기서 그는 경허가 10대 때 살았던 청계사가 당취승(땡초)들의 소굴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사(大師)는 청계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오계를 받고 중이 되었으나 상경(上京. 청계사에 온 지)한지 6년째 되던 14세였다. 그러나 그때나 이때나 청계사는 변두리 절이요. 승려라고 있는 것은 모두 무식한 사람들뿐이라. 그들의 행리(行履)라는 것은 당취(黨聚)로 몰려다니면서 동령승(動鈴僧, 동량승)으로 기인취물(欺人取物)과 같은 권선(勸善)으로 탁발 벌이를 하여서 계집이나 보러 다니고 도박장이나 벌려서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일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허구헌날 술과 계집이 눈에 보이고 그들의 잡행(雜行)과 난행(亂行)이 이목(耳目)에 익혔을 뿐이다. 그중에도 계허(桂虛)라는 이는 가장 점잖고 나은 편이었으나 그다지 배울 것은 없었다. 대사는 이러한 암굴(庵窟) 속에서 2년 동안 글 한 자 배우지 못하고 사역(使役, 심부름) 시봉(侍奉)만 하고 경과(經過)하였었다.”

  김태흡(대은)은 이 글을 쓰면서 왜 자신이 이 글을 쓰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나는 경허대사를 그려보려고 생각한 지 퍽 오래였었다. (……) 나는 그를 그렇게 미워할 바도 없고 또 그렇게 숭배하려고도 아니한다. 그러나 내가 대사에게 마음이 끌리는 점은 당시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미워하여 비방하는 중에도 어떤 사람은 술을 받고 고기를 사서 걸머지고 그를 찾아가서 꾸벅꾸벅 절을 하며 법을 청문하고 그를 부처님과 같이 존숭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보면 그는 미운 짓을 하는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내놓을 것이 있고 남이 알지 못하는 도리(道理)를 증오(證俉)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위의 글은 김태흡이 1938년에 발표한 것인데, 경허의 입적이 1912년이므로 그다지 많은 시간이 경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연재 끝에 “그러므로 나는 경허대사를 가리켜서 조선의 걸승(傑僧)이라고 보고 그 풍모를 사모(思慕)해 본 적이 많았기 때문에 수년 동안 그의 행적을 조사하여 가지고 이 소고(小考)를 쓰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김태흡이 이 글을 쓸 때는 경허의 양대 제자인 만공과 한암이 건재해 있을 때였고, 경허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였으니, 비교적 정확한 서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새로운 사실은 경허가 10대 소년기를 보냈던 의왕 청계사는 당취승(黨聚僧, 땡초)의 소굴이었다는 점이다. 즉 경허의 주색은 그들로부터 배운 것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경허가 비록 행위적인 면에서는 비방을 살만했으나 남다른 증오처(證悟處)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능화의 평(評)과 경허의 두 제자인 만공과 한암의 말, 그리고 김태흡의 글을 종합해 본다면 평소 경허가 주색(酒色)을 서슴없이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경허는 그와 같은 사실을 구례 화엄사 강백(講伯)인 진진응(陳震應)과의 대화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역시 김태흡의 글 「인간 경허」에 실려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 한번 만나보고자 했던 차에 어느 날 경허가 화엄사 수도암에 가서 진진응과 선(禪), 화엄경 등의 이치에 대하여 법담을 했는데, 마음이 상통하여 경허는 수도암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한다.

  “경허화상은 이 수도암에서 며칠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역시 주색(酒色)에 빠져서 낮이 되면 술을 받아오라고 조르고 밤이 되면 주막(酒幕) 여자를 불러오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진응화상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해인사의 인파(印波)화상 같은 이는 일평생에 색(色)을 멀리하면서 동지섣달 설한풍에도 학인들을 마루에 앉히고 글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화상은 이약대사(以若大師, 대사라고 하는 분)로 그만한 것을 제어치 못하니 어찌 후생의 사범(師範)이 되기를 기약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런즉 대사도 얼굴에 홍조(紅潮)를 띠우고 말하기를 ‘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지만 다생의 습기는 깊어서, 바람은 고요해도 파도는 용솟음치고, 이치는 분명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침노한다).’라는 글도 있지 않소. 나야말로 그와 같소. 내가 출가했던 광주 청계사는 당취승의 소혈(所穴)로서 뭇사람들이 주색에 빠진 것을 어려서부터 숙견숙문(熟見熟聞)하여, 이것이 습이성성(習而成性, 습관이 본성이 된 것)이 되어서 그칠 수가 없게 되었소. 그런 中 이제는 항상 성공(性空, 성품이 공함)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 괘념(掛念)도 되지를 않는구려. 대승은 불구소절(不拘小節, 대승은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음)이라할까요. 그러나 식색(食色)은 인간의 본능이거니 이것을 어찌하겠소.”

  이것은 『능엄경』에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則頓悟, 事非頓除, 이치로는 돈오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번에 제거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비록 ‘습기 때문에 주색을 끊지 못하고 있지만, 성품은 공(空)이므로 거기에 걸리지는 않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1900년 4월 경허(55세)는 범어사에서 ‘범어사 총섭방함록 서(序)’를 쓰고, 이어 송광사, 태안사, 화엄사, 지리산 천은사, 영원사, 실상사 등을 방문한다. 실상사에서는 ‘남원 실상사 백장암 중수문(重修文)’을 쓰고, 12월에는 ‘화엄사 상원암 복설선실 정완규문(復設禪室定完規文)’을 썼는데, 화엄사 강백 진진응과의 만남은 이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여 진다.
  경허의 법제자 한암중원은 「경허화상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화상의 오도(悟道)와 교화 인연은 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만약 그 분의 행리(行履)를 논할 것 같으면 (……) 음식과 성색(聲色)에 구애를 받지 않고 호탕하게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곧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문(不二門)을 증득하여 자재 초탈함이 저 이통현 장자의 종도자(宗道者)와 같이 툭 트여서인가, 아니면 (선이 흥하는) 시대를 만나지 못하여 비분강개한 나머지 몸을 하열한 곳에 숨기고 신분을 낮추어 스스로를 기르고 도(道)로써 즐거움을 삼은 까닭인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뜻을 알기 어렵나니, 크게 깨달은 경지가 아니면 어찌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할 수 있겠는가. 화상의 시에 ‘酒或放光色復然, 貪瞋煩惱送驢年. 佛與衆生吾不識, 平生宜作醉狂僧(술에 취하고 여색도 그러해 / 탐진 번뇌로 나귀 해를 보내노라 / 부처와 중생 내 알 바 아니니 / 평생 술에 취한 중(취광승)으로 살리. 필자 번역)’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화상 스스로 일생의 행리를 표현한 것이다.”

  한암은 경허화상의 행위에 대하여 ‘홍곡이 아니면 어찌 홍곡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법과 교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然, 後之學者, 學和尙之法化則可, 學和尙之行履則不可, 人信而不解也)”라고 하여 엄격하게 선(線)을 긋고 있다. 이는 훗날 납자들이 계행을 무시한 채 경허의 행위를 답습할까 우려한 것이다.
  경허의 행위(즉 酒色)는 승가적(僧伽的)으로는 물론이고, 사회규범이나 도덕적으로도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다. 율장에 의거해 논한다면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불교가 주색과 도박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도 경허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Ⅱ. 경허의 삼수갑산행

  경허는 만년에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로 바꾸고 스스로 속인이 되어 삼수갑산에 입몰했다. 그는 왜 선원의 조실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서북단(西北端)의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갑산으로 간 것일까?
  그의 삼수갑산행에 대하여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 제도)’, ‘이류중행(異類中行, 중생 속으로 들어가다)’, ‘우국(憂國, 망국에 대한 울분)’ 혹은 ‘시봉하던 사미가 계룡산에서 도적들에게 죽임 당하자 살인자로 지목되어 도피하게 되었다’ 등의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2장에서는 그의 갑산행에 대하여 그가 남긴 산문과 시, 오도송 등을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경허가 삼수갑산을 향하여 장도(壯途)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58세 때인 1903년 초가을로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친 직후이다. 당시 경허는 1899년 동안거에 이어 두 번째로 해인사 조실에 추대되었는데, 하안거를 맞이하기 위하여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다가 의미심장한 시 한편을 읊는다.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읊다(自梵魚寺 向海印寺 道中口號)’라는 시이다. 

     아는 것은 얕은데 이름만 높고
     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알 수 없네.
     어촌과 주막 어찌 몸 숨길 곳 없으리오 마는
     다만 이름을 숨길수록 더욱 알려질까 두렵구나.

  이 시에서 경허는 처음으로 은둔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는데 그것이 일시적인 감상이 아니라, 상당히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훼찬(毁讚), 세속적인 시비(是非)와 단절하고, 아는 사람이 없는 오지로 가서 영영 종적을 감추고자 마음을 작정한 듯하다.
  경허가 호서(湖西)에 있다가 경남으로 가는 것은 그의 나이 52세 무렵인 1898년 봄이다. 범어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범어사에 새로 선원을 개설하고, 다음 해인 1899년 동안거 때는 해인사에 선원을 개설한다. 이후 1903년까지 5~6년 동안 범어사와 해인사, 통도사, 화엄사 등 경남 일대에 머물면서 선을 중흥시키는데, 이미 음주식육과 여색 등으로 무성했던 경허의 이름은 이때 더욱 알려진다. 그런데 그 속에는 찬사(즉 깨달은 경지)와 비난(즉 酒色)이 극과 극을 이루었다.
  김태흡은 「인간 경허」(『비판』,1938년, 6월호) 첫머리에서 “만근(輓近) 4,5십년간 이래에 있어서 조선불교선종이 일어난 동기를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경허화상을 첫머리에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워도 경허대사요. 고와도 경허대사라. 행리(행위)야 어쨌든 간에 근대 선종의 중흥조 됨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승려가 꽤 많지만, (……) 경허대사처럼 부처님 대접을 받아본 사람도 없고, 경허대사처럼 악마(惡魔)라는 혹평과 마종(魔種)이라는 비방을 들은 이도 없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지금은 미화 일색이지만 당시에는 ‘악마(惡魔)’ ‘마종(魔種)’이라는 원색적인 혹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허 역시 「취은화상행장」 끝에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쓸데가 없고, 그리고 부처님 교화에도 폐단을 끼쳐 백가지 잘못을 함께 일으켜서 도덕(道德)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데, 문장으로 또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비분강개하여 문묵(文墨, 취은화상행장 등 문장 작성)을 놓아 버린 지 수년이 되었다.”라고 하여 자신의 행위가 불교에 폐해가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분강개하고 있는데, 그 비분강개는 자신의 깨달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데 대한 실망과 체념, 좌절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이라는 제목의 24번째 시인데, 언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6번째 시에는 계룡산이 나오고, 18번째 시에는 연암산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호서 일대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인심은 사납기가 맹호(猛虎)와 같아서
  악(惡)하고 독(毒)한 것이 하늘을 찌른다.
  학은 짝과 함께 구름 밖에서 노니는데,
  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꼬?

  그의 고독이 짙게 느껴진다. 함께 노닐 수 있는 지음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자신을 두고 세간에서 회자되고 있는 혹평의 엄혹함에 대해서도 의식하고 있다. 여기서도 그의 은둔하고자 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1. 경허의 고독과 술, 그리고 무상

  경허의 시편(詩篇)은 약 240여 편이 된다. 한암 필사본 『경허집』(1931년)에는 약 135편 가량이 실려 있고, 선학원판 『경허집』(1943년)에는 약 226편 가량, 수덕사에서 번역 간행된 『경허법어』(1981년)에는 245편 가량 실려 있는데, 이는 갑산 이후에 지은 시와 수집에서 빠진 시가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경허의 시가 대부분 5언8구, 또는 7언8구로 비교적 긴 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선승의 시로서는 적은 편은 아니다. 그 내용을 분류해 보면 선의 세계, 선리(禪理), 선지(禪旨) 등에 대하여 읊은 시(詩/禪詩)가 가장 많고, 그 다음에는 깊은 허무와 고독, 늙음, 무상, 이별, 은둔, 염세 등에 대하여 읊은 시가 많다. 그리고 술을 마신 뒤에 읊은 시(酒醉詩)도 적지 않고, 우국(憂國)과 관련된 시가 4~5편, 지음자가 없는 데 대하여 탄식한 시가 5-6편, 여색(女色)과 관련된 시도 있다. 이 시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그리고 번역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선승의 시라고 해서 모두 심오한 선의 세계를 읊은 선시(禪詩)로 해석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지나친 의미 부여나 과잉 해석은 진실을 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학원판 『경허집』을 기준으로 허무와 고독, 늙음, 무상, 이별, 은둔, 염세, 그리고 술이 등장하는 시는 대략 80여 편 정도가 된다. 이 5~6가지 테마는 상관성이 매우 깊다.
 
1) 허무, 고독, 늙음, 무상

  먼저 허무, 고독, 늙음, 무상, 이별, 술이 복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 가운데 대표적인 몇 편을 보고자 한다. ‘송광사 월화강백과 함께 화엄사로 가는 길에 읊다(松廣寺月和講伯同行華嚴路中口號)’라고 하는 연시(連詩) 가운데 두 번째 시와 세 번째 시, 그리고 ‘청암사 조실방에서 밤에 만우당과 이별하면서(靑岩寺祖室夜與萬愚堂話別),’ 등이다(밑줄 친 곳 참조).

① 월화강백과 함께 화엄사로 가는 길에 읊다(松廣寺月和講伯同行華嚴路中口號) 二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몇 번이나 돌았나.
더딘 걸음 긴 여정 앞서 가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찬 연기 앙상한 가지에 봄은 아직 이른데
담담한 구름 외로운 새 석양 가를 날으네.
정처 없이 떠돌던 나그네 어쩌다 늙어버렸지만
취하여 세상 밖에서 잠자니 아무것도 방해로울 것 없네.
술잔에 술 아직 남았는데 벗이 또 권하네
풍류는 그저 저 하늘에 맡겨 버리리라.

② 상동(上同) 三

발을 씻던지 갓끈을 씻던지 그것은 물의 청탁에 맡겼거늘
하물며 춘몽 같고 물거품 같은 인생이랴.
(……)
끝없는 시상(詩想)에 취하고 싶지만
숲에 가려 술집 간판이 보이지 않네

③ 청암사 조실방에서 밤에 만우당과 이별하면서(靑岩寺祖室夜與萬愚堂話別)

귀뚜라미 울고 밤비 내리는 벽산루
은연히 고향 생각 거듭 떠오르네.
만사 구름 같거늘 어떤 것이 참다운가.
백년 세월은 흐르는 물 같고 이 생은 부질없어.
모임도 억지로 어려워 오늘도 늦어지고
무단히 빈자리 몇 해나 되었던가.
백발 슬픈데 표표하게 흩어지네.
어떻게 견디리오.
그대는 가버리고 나만 남았으니.
 
  위의 시들은 모두 경허가 갑산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지은 시다. 이 시들에서는 늙음, 무상, 허무, 고독, 그리고 인생이 복합적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청암사 조실에서 만우당과 이별하면서 지은 시는 더욱 고독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문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나다.
  경허의 고독과 슬픔은 무엇일까? 그의 고독과 슬픔은 늙음, 무상, 허무, 그리고 지음자가 없는 데서 오는 고독이다. 선승의 시로서 이렇게 가식이 없는 시도 드물다. 이 밖에도 술, 허무, 고독, 늙음, 무상 등에 대하여 읊은 시는 매우 많다.
  붓다도 『법구경』, 『숫타니파타』 등에서 무상에 대하여 읊고 있는 시구가 매우 많다. 그런데 그 차이점은 붓다의 무상시는 시종일관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이라고 파악하여 그것을 쫓지 말라’는데 비하여, 경허의 무상시는 깊은 허무와 거듭된 탄식에 머무르고 있다.


2) 주색시(酒色詩)

  다음은 경허의 시편 중 술과 여색, 그리고 선지(禪旨)를 함께 읊고 있는 시이다.

① 불명산 윤필암을 지나가며(過佛明山尹弼庵)

  술에 취하고 여색(女色)도 마찬가지
  탐진 번뇌(貪瞋煩惱) 나귀 해에 보내리(送驢年).
  지팡이와 집신이 뜬금없이 사자로 변하여
  등한히 한 번 뜀에 누가 능히 앞서리오.

② 우음(偶吟) 8

  부처니 중생이니 그런 건 나는 몰라
  근래엔 술 취한 미친 중이 되었네.
  때때로 일 없이 한가하게 바라보니
  먼 산은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르네.

  ‘술과 여색, 그리고 탐진 번뇌는 나귀 해(驢年)에 보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여년(驢年)은 ‘나귀 해’를 뜻하는데 12간지 가운데 나귀 해는 없다. 이는 주로 ‘기약할 수 없음’, ‘성사될 수 없음’, ‘불가능함’을 뜻한다. 『나옹어록』 등 선승들의 어록에도 종종 나오는데 역시 같은 뜻이다. 즉 나귀 해가 와야만 주색(酒色), 탐진 번뇌 등과 송별(送別, 別離)할 수 있는데(送驢年) 백년, 천년이 가도 나귀 해는 오지 않으므로 영영 송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는 술과 여색을 즐기는 경허의 행리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 경허의 시(詩)에는 ‘송여년(送驢年)’이라고 쓰고 있는 시구가 하나 더 있다. 이를 참고한다면 송여년(送驢年)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7언 율시(律詩) 가운데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의 두 번째 시로, “換水添香願福田, 鬼魔窟裡送驢年, 弱喪幾刼水中泡 忽覺當身火裏蓮”의 2구(承句)에 ‘送驢年’이라는 말이 나온다. 염불이나 하고 있는 승려들을 비판하고 있는 시 같다.

다기(茶器)에 물을 갈고 향 피우고 복을 빌면서
귀신굴 속에서 나귀 해를 보내고 있네
허망한 몸 몇 겁이나 물거품처럼 지냈나?
홀연히 이 몸이 불 속의 연꽃임을 깨달았네.

  즉 아무리 불전에서 다기 물을 올리고 향을 피우고 복을 빌어봐야 그런 것으로는 깨달을 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귀신 굴(무명)에 앉아서 나귀 해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쓸데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3) 우국시(憂國詩)

  다음은 나라 걱정 즉 우국(憂國)과 관련된 시이다. 우국시는 4~5편 되는데 한 편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갑산으로 들어간 이후 우국지사들과의 교류 속에서 읊은 시이다. ‘상원암에서 하천과 더불어 옛 회포를 풀다(上院庵與荷川叙舊)’라는 시 가운데 두 번째 시의 5, 6, 7, 8구이다.

① 하천과 더불어 옛 회포를 풀다(上院庵與荷川叙舊)

  흉년을 생각하니 좋은 음식도 넘어가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憂國)에
  등나무 침상에 누워도 편치 않네.
  쇠락한 국운을 논(論)하니 감개가 많아
  시름없이 외등만 바라보고 있네.

② ‘공귀리의 여러 벗들에게 화답하다(公貴里和諸益)’라는 시 가운데 세 번째 시의 3, 4, 5, 6구이다.

 한잔 술로 만 겹의 청산을 대하고
 천리 길 백발만 날리는구나.
 술 취해서 나라 잊으려고 하지만
 신선 찾은 이곳도 역시 내 나라.


2. 경허의 탄식과 지음자(知音者)

  경허의 시문(詩文)에는 지기(知己), 지음자(知音者), 그리고 법을 전해줄 사람이 없는 데 대하여 깊이 탄식하고 있는 대목이 매우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고무인(四顧無人,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으로 시작해서 ‘사고무인(四顧無人)’으로 맺고 있는 그의 오도가(悟道歌)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 없으니 의발(衣鉢)을 누구에게 전할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사방 둘러봐도 사람 없구나(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 ……
  봄 산에 꽃이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네. 정녕 이런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一曲歌)를 아는 사람이 없구나. 시절인가(말세)? 나의 운명인가? 또한 어찌하랴?
 어떤 이가 ‘소가 되어도 코뚜레를 꿸 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에서 나의 본심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공(空)하고 형상도 공하여, 공적(空寂)한 곳에 항상 밝은 빛이여.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으니, 눈앞에 외로운 빛은 寂光土요. 머리 뒤 신묘한 모양은 金剛界네. ……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된 말을 한다고 하여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귓구멍이 뚫린 나그네가 있어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곧 安心立命處를 얻을 것이다. ……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한 번 사람 몸 잃으면 만겁토록 다시 만나기 어렵나니, 하물며 허망한 목숨 아침에 붙어 있다고 한들 어찌 저녁을 기약할 수 있으리오. …… 저 사람도 같고 이 사람도 같네, 어찌 나에게 와서 무생(無生, 불생불멸의 진리)의 법을 배워 인천(人天)의 대장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 이 때문에 내가 거듭 입이 아프도록 부탁하는 것은, 내 일찍이 방랑자가 되어보았기에 나 역시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오. 아~아, 그만 둘진저(嗚呼. 已矣夫)!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사방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 둘러봐도 사람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四顧無人, 衣鉢誰傳).

   홀연히 코뚜레 꿸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세계가 내 집(진여)이네.
   6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야인(野人, 경허)이 무사태평가를 부르네.”

  그의 탄식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법을 전해 줄 사람이 없음에서 오는 탄식이다. 선승으로서 이런 장탄식도 드물다. 그것은 곧 한말의 황량한 선불교에 대한 탄식이고 개인적으로는 지음자가 없는 데 대한 탄식이다. 또 경허는 “아무리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불러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시절이 말세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된 말을 한다고 하여 믿지 않고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이 깨달은 것, 즉 무생의 진리에 대하여 말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데 대하여 깊게 한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의부(已矣夫)’는 ‘아, 이젠 다 틀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 혹은 ‘끝났구나’라는 의미로, 주로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낼 때 쓰이는 한탄사(恨歎辭)이다.
  춘추시대에 공자는 당시 도덕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데 대하여 “틀렸구나. 나는 도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已矣乎.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라고 했는데, 시대와 상황, 주제는 달라도 ‘이의부(已矣夫)’가 주는 탄식의 강도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선승들이 깨달은 후 남긴 오도송은 많지만, 이와 같이 고구정녕한 오도송은 없을 것이다. 이 오도가에는 한말 선불교의 황폐한 상황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경허는 불타의 혜명(慧命), 선의 전등(傳燈)이 꺼져가고 있음에 대하여 깊이 탄식, 우려하고 있다. 그 밖에도 화엄사 상원암에 선실을 복원하면서 지은 글과 범어사 금강암 칠성각 창건기에도 부처님의 혜명이 전해지지 않음에 대하여 탄식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본다면 그의 탄식은 ‘우선(憂禪)’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의 ‘사고무인 의발수전(四顧無人 衣鉢誰傳)’에 대하여 그의 법제자 한암중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오도가에 처음에도 ‘사고무인’이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또 끝에서도 ‘사고무인’이라는 말로 맺었으니, 이것은 그 스승과 도반(師友) 사이의 도(道)의 연원(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서로 인증하여 법을 받고 전수해 줄 곳이 없기 때문에 깊이 탄식한 것이다”

  한암은 경허가 법을 전해 줄 사람도 없지만, 동시에 자신의 깨달음을 인증 받을 곳도 없기 때문에 탄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허는 해인사에서 1903년 하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만행 길에 오른다. 당시 상황을 한암은 「일생패궐」에서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마친 뒤 화상께서는 곧장 범어사로 떠나가셨다. 대중들도 모두 흩어졌으나 나는 병에 걸려 갈 수가 없었다. (……) 그해 겨울(1904년) 경허화상께서는 북쪽으로 잠적하셨는데 다시는 뵈올 수가 없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때 경허는 한암에게 전별사(餞別辭)를 주었는데, 역시 지음자가 없는 데 대하여 탄식을 하고 있다. (아래의 밑줄 참고).

  “나는 천성이 세간의 티끌 속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또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해인사)에서 원개사(遠開士 : 한암重遠)를 만나게 되었소. 그대는 성품과 행동, 바탕이 곧고 학문이 고명하여서 그대와 함께 동안거를 보내면서 서로 세상을 얻은 듯하였는데 ……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가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이별의 쓸쓸한 마음을 더 무어라고 말할 수 있으리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하지 않았던가. 아, 원개사(遠開士)가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리! 그래서 엉터리 시 한 수 붙여서, 이것으로써 후일 서로 잊지 않는 징표로 삼고자 하네.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로
  얼마나 부질없이 나뭇가지를 왔다 갔다 했던가?
  이별이란 흔한 일, 어려운 게 아니지만
  덧없는 인생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리.” 

  지음자가 없는 데 대한 탄식은 다음의 몇 편의 시에도 나온다. ‘옥과 관음사 수익스님에게 주다(贈玉果觀音寺修益師)’라는 시다.

  천애(天涯, 독신)의 나그네 쓰라림을 어이 견디랴.
  뜻 높은 이들 이 강당에 서로 찾아드네.
  비록 마음은 달과 같이 변함없건만
  헤어져 있는 동안 머리만 희었네.
  붕새처럼 천리를 도모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개미의 꿈처럼 온 나라 분망(奔忙)하구나.
  옛 오동나무 석자 거문고에 知音은 끊겼지만
  버드나무를 꺾어 만든 피리 소리도 무방하네.

  이 시에서는 지음자, 고독과 늙음이 함께 등장한다. 특히 옛 ‘오동나무 거문고에 지음(知音)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달마 이후 조선에 전해져 오던 선의 전등(傳燈)이 끊어져 가고 있음을 뜻한다고 보여 진다.
  청허휴정 이후 조선 후기 불교는 백암성총(1631~1700),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인악의첨(仁岳義沾, 1746~1796) 등 뛰어난 강백의 출현으로 화엄교학 등 교학과 강원은 흥성해졌지만, 경허가 활동하던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까지 선은 지리멸렬하여 전국에 선원은 몇 곳 없었다. 있다고 해도 선방을 지키는 정도였고 수행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하권에서 “조선의 모든 승려 7,000명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9는 모두 교종이며, 실은 선(禪)도 교(敎)도 아닌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Ⅲ. 맺는 말

  경허는 1903년(58세) 초가을 해인사를 떠나 1904년에는 범어사와 서산 천장암 등을 거쳐서 1905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3개월 동안 화엄경 법문을 한다. 이어 금강산을 유람하고 1906년(61세)에는 안변 석왕사 나한전 개금불사 증명을 끝으로 삼수갑산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이름을 박난주로 바꾸고 유생(儒生)이 되어 훈장 노릇을 하다가 은둔한지 6년 후인 1912년 4월 25일 67세의 나이로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그 파란만장한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 경허의 파계적 삶에 대한 불교계의 평가가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하권에서 “세인들이 말하기를 ‘경허화상은 변재(辯才, 말을 잘함)가 뛰어나고, 그가 설한 바 법은 비록 옛 조사(祖師)라고 할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이가 없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음행(淫行)과 투도(偸盜)를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 세상의 납자들은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음주식육이 깨달음과 무관하고, 행음행도(行淫行盜)가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창언(倡言)하면서, 이를 대승선이라고 한다. 또 그 막행막식(無行)의 잘못을 엄폐 가장(假裝)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갔으니, 대개 이러한 폐풍은 실로 그 원형이 경허(鏡虛)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총림(叢林, 선원)에서는 이를 지목하여 마설(魔說)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또 경허를 흠모하고 있는 김태흡 역시 「인간 경허」(『비판』,1938년, 6월호)에서 “만근(輓近) 4,5십년간 이래에 있어서 조선불교선종이 일어난 동기를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경허화상을 첫머리에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워도 경허대사요. 고와도 경허대사라. 행리(행위)야 어쨌든 간에 근대 선종의 중흥조 됨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승려가 꽤 많지만, (……) 경허대사처럼 부처님 대접을 받아본 사람도 없고, 경허대사처럼 악마(惡魔)라는 혹평과 마종(魔種)이라는 비방을 들은 이도 없을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선(禪)과 주색 등 파계적인 행위에 대하여 당시 여불(如佛) 대접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마(惡魔)’ ‘마종(魔種)’이라고 하여 원색적인 혹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경허 자신도 자신의 삶에 대해 변병하거나 후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화엄사 강백 진진응(陳震應)과의 대화에서, 진진응이 “‘해인사의 인파(印波)화상 같은 이는 일평생에 색(色)을 멀리하면서 동지섣달 설한풍에도 학인들을 마루에 앉히고 글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화상은 이약대사(以若大師, 대사라고 하는 분)로 그만한 것을 제어치 못하니 어찌 후생의 사범(師範)이 되기를 기약하겠습니까?’라고 하자, 경허대사도 얼굴에 홍조(紅潮)를 띠우고 말하기를 ‘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돈오는 비록 부처와 동일하지만 다생의 습기는 깊어서, 바람은 고요해도 파도는 용솟음치고, 이치는 분명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침노한다).’라는 글도 있지 않소. 나야말로 그와 같소. 내가 출가했던 광주 청계사는 당취승의 소혈(所穴)로서 뭇사람들이 주색에 빠진 것을 어려서부터 숙견숙문(熟見熟聞)하여, 이것이 습이성성(習而成性, 습관이 본성이 된 것)이 되어서 그칠 수가 없게 되었소...... 그러나 식색(食色)은 인간의 본능이거니 이것을 어찌하겠소.” 라고 하여,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알고는 있지만, 청계사에서 견문(見聞)한 습기(習氣)와 인간의 본능 때문에 현재도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취은화상행장」 끝에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쓸데가 없고, 그리고 부처님 교화에도 폐단을 끼쳐 백가지 잘못을 함께 일으켜서 도덕(道德)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데, 문장으로 또 어떻게 구제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비분강개하여 문묵(文墨, 취은화상행장 등 문장 작성)을 놓아 버린 지 수년이 되었다.”라고 하여 자신의 행위가 불교에 폐해가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다.

3. 경허의 삼수갑산행은 그 돌연성 때문에 신비화, 미화하고 있다. 이는 아마 고승의 행적을 미화하려는 후대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보면 그의 삼수갑산행은 염세(厭世), 은둔 등 다분히 도피적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이는 경허가 남긴 시문 즉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읊다(自梵魚寺 向海印寺 道中口號)’에서 “아는 것은 얕은데 이름만 높고/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구나./어느 곳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알 수 없네./어촌과 주막 어찌 몸 숨길 곳 없으리오 마는/다만 이름을 숨길수록 더욱 알려질까 두렵구나.” 그리고 “인심은 사납기가 맹호(猛虎)와 같아서/악(惡)하고 독(毒)한 것이 하늘을 찌른다./학은 짝과 함께 구름 밖에서 노니는데,/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꼬?” 등에서 나타난다.
경허의 삼수갑산행의 진의는 매우 복합적이다. 경허는 음주식육과 여색(女色) 등 비도덕적, 계율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로 인하여 승가의 구성원들과 세인들로부터 ‘악마(惡魔)’, ‘마종(魔種)’이라는 원색적인 비판과 비난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은둔을 선택했다고 생각된다. 즉 자신에 대한 훼찬(毁讚) 등 시비(是非)를 피하여 상면인(相面人)이 없는 곳으로 영영 종적을 감추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은둔 지역을 남한이 아닌 서북단(西北(端)의 오지인 갑산을 택했고, 이름을 박난주로 바꾸었고 유생 차림으로 입적한 점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또 그의 삼수갑산행 속에는 평소 그가 깊은 허무, 고독, 늙음, 무상 등에 젖어 있었던 점도 요인이었다고 본다.

4. 경허의 행위(즉 酒色)를 옹호적인 측면에서 보는 것은 그가 전통선을 부활시킨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뒷날 한국선종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그의 제자 가운데 만공이나 한암과 같은 고승이 없었다면 경허는 진작 폄하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계율을 어느 정도는 지켜야할 고승으로서 드러내 놓고 음주식육과 여색, 끽연(喫煙) 등 막행막식으로 계율 의식을 무너뜨리고 후대 수행자들로 하여금 주색을 답습하게 한 것은 일대 과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후배 고승인 백용성, 박한영, 방한암 등은 그러지 않았다. 붓다는 물론, 보리달마, 육조혜능, 조주, 임제의현, 보조지눌, 청허휴정 등도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초월했다면 당연히 욕망도 초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선(禪)은 다시 일으켰지만 불교는 깊은 병에 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계율 의식의 부재로 인격적 형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깨달음의 세계가 위대하다고 해도 행위, 계행이 바르지 못하다면 인천(人天)의 사표(師表)가 될 수 없다.

5. 경허 입적 100년을 맞아 ‘경허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보다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그의 직제자 만공은 ‘선(善)은 부처, 악은 호랑이보다 더했다(善惡過虎佛)’고 했고, 법제자 한암은 “법을 따르는 것은 좋으나 행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이능화, 김태흡, 진진응의 말에서도 볼 수 잇듯이, 경허에 대한 공(功)과 과(過)가 극명하다. 공(功)은 따라가되 과(過)는 쫒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의 수행자들은 경허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지혜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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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 : 학술전문 출판사 민족사 대표. 1972년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 논문으로는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한암선사의 서간문 고찰」, 「무자화두 십종병에 대한 고찰」 「성철의 오매일여관 비판」 등이 있고, 저서로는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8선󰡕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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