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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아래, 산을 도량 삼고 절을 성지 삼고 흙이 신앙 자체인 화가, 조각가, 소설가를 찾아가다 (한겨레21) 2012.07.14 > 언론에 비친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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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언론에 비친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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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아래, 산을 도량 삼고 절을 성지 삼고 흙이 신앙 자체인 화가, 조각가, 소설가를 찾아가다 (한겨레21) 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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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7-14 09:27 조회9,7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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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곳에 예술가들이 산다 [2012.07.13. 제919호]
▣ 남은주
[레드 기획] 월정사 아래, 산을 도량 삼고 절을 성지 삼고 흙이 신앙 자체인 화가, 조각가, 소설가를 찾아가다
» 집 전화번호까지 외우고 만나서 반가워 웃는 폼이 여러 날 친구로 묵은 사이를 짐작게 한다. 하지만 각자 오대산 골짜기에서 도 닦느라 잘 만나지지 않는다 한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날까요? 만나고 돌아가면 그간 쌓은 것을 다시 쌓아야 하니까요.” 왼쪽부터 화가 장영철, 소설가 신동환, 화가 이규석씨.
“월정사. 그곳은 아주 먼 곳이다”라고 시인 고은은 썼다. 그곳에 가면 아무리 백치라도 지혜를 만나고 아무리 욕망이 많은 사람도 욕망을 죽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도 했다. 서울에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까지 200km를 좀 넘는 거리, 멀면 얼마나 멀다고. 멀다고 한 것은 오대산 탓이다. 출가의 다른 말이 입산수도이듯이, 산에 들어가면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과 정진이 시작된다. 번잡함을 떠나 고요한 성찰과 선정을 통해 자기를 바로 보고 깨달음을 구하는 데 산은 더할 나위 없는 수행처다. 게다가 오대산은 오만진신의 성지다. 5개 봉우리에 부처가 1만 명씩 상주한다는 곳이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흙 자체가 신앙의 대상인 곳이다. 오대산은 인연이 얽혀서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구도의 장소로 선택하는 곳이다. 산과 절과 마을의 경계가 잘 구별되지 않는 이곳에서 수행하듯 그림 그리고, 나무를 깎고,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수리취 뜯고 절떡 얻으며 절 그늘에 깃들다

화가 장영철(57)씨는 오대산 월정사 땅에 산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길에서 차가 다니는 포장길을 벗어나 얕은 개울을 건너면 예전에 사람들이 산을 넘던 흙길이 망초꽃에 묻혀 있다. 잊혀진 길을 가려면 풀숲을 헤치고 걸어야 한다. 거리로 보자면 두 절의 딱 중간쯤에 장씨의 집이 있다. 가물어서 개울 바닥이 보일 때는 차도 사람도 쉽게 건널 수 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쌓일라치면 고립무원, 2~3일씩 집에 갇히기 일쑤다. “그림을 그려봤자 보여줄 사람이 없어. 지나가는 다람쥐한테나 보여줄까.” 오대산에 들어온 지 10년, 자진 유배하듯 지낸 산중 생활에서 그린 그림을 모아 지난 6월1일 서울 종로의 나무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소나무와 암자, 구도의 경전이 담긴 수묵담채화 30여 점이 사람들에게 공개됐다. 산수화의 대가인 낙봉 이학상의 제자로 수묵담채 산수화에 입문한 지 27년 된 그가 4번째 여는 개인전이다.

장영철 작가는 10년 만에 가진 이 전시를 ‘쌀값 전시회’라고 부른다. “내 평생 3번 했으면 많이 했다”고 다시는 전시회를 안 하려고 했는데 쌀값이 궁해서 혼자 수행한 그림을 다시 서울에 보냈다는 것이다. 당초 “명색이 그림쟁이인데 그림으로 먹고살 길이 없어서” 오대산에 왔다. 그저 산에서 살려고 했지 그림을 얻으러 온 것은 아니란다. 처음엔 오대산중에서 산장지기 노릇을 했다.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데 팔자에 없는 장사를 하려니 덜컥 병이 났다. 5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나서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한테 찾아가 그저 머물기만 할 곳을 주시라고 청했다.

왜 하필 오대산일까? 장 작가는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다”고 했다. 그의 집앞에는 진부의 노인단체가 운영하는 주말농장이 제법 크지만 거기에 장씨네 밭은 없다. 텃밭 가장자리에 세 들어서 몇 포기, 울타리를 따라서 옥수수, 고추, 상추 몇 포기 심은 것이 전부다. 그래도 산에 가면 철 따라 먹을 게 난다. 버섯이나 나물은 심심찮게 거둔다. 월정사와 상원사, 큰 절과 가까이 지내니 절에 일이 생기면 먹을 것이 또 들어온다. 수리취, 쑥, 당귀를 넣어 빚은 떡이며 인절미를 나누고 절 그늘에서 같이 먹고 산다. 오대산의 많은 자락은 월정사 땅이다. 워낙 전국에 말사만 62곳을 거느린 큰 절이다. 오대산 국립공원의 19.1%가 절 소유인 사찰지다. 불교환경연대에서 일했던 부인 최경애(55)씨와 그가 오대산에 살려면 월정사 그늘에 깃드는 것이 당연했다. 오래전부터 비어 있던 이 집은 겨울에는 자고 나면 눈썹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고 멀리 떨어진 못에서 물을 길어와야 하지만 화두를 잡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 그림 든 아저씨: 월정사와 상원사 중간에 있는 장영철씨 집은 장마가 오면 꼼짝을 못한다. 그 집에서 장씨는 ‘절대 자유’ 화두를 붙들었다. 작업실에서 손님에게 줄 그림을 꺼내어 바라보고 있다. “다람쥐한테 그림을 줄 수도 없고….”

화가는 진경산수의 일부가 되고


지금은 불교미술을 공부한 부인이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일하고, 장 작가는 예전에 조선실록을 보존하던 건물인 오대산 사고 지키는 일을 하며 밥을 먹는다. 밤새워 인정사정없이 그림을 그려대던 젊은 시절은 지나가고 놀다가 싫증 나면 그리기를 여러 번 한다. 이번 전시에선 장씨가 어여뻐하는 소나무와 그가 수십 년 목맨 화두집 <벽암록>을 소재로 삼은 그림이 지천이다. 그래서 전시의 주제는 ‘일측일송, 화두를 느끼다’가 되었다. 그림 속 기세 좋은 노송이며 둥글게 빚은 바위를 묻자 장씨는 대뜸 “그렇게 생긴 나무가 있을 줄 아쇼?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지” 한다. “설봉(장영철 작가의 호)은 자연을 물질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심안을 통해 암중에서 자연을 인식하려고 한다”는 것이 충북대 김준근 교수의 평이다. 부인 최경애씨는 오대산에서 10년을 살다 보니 그림에서 산빛이 변화무쌍하게 구체화됐다고 하고, 장씨 자신은 그림에 주관만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모든 존재와 형상은 상대적 인식이며 관념적 허상이므로 세계는 완전한 자유와 평화”라는 화두를 붙든 참이란다. 어쨌거나 “오대산에 살고 있으니 오대산에서 받은 게 쌓여서 나오는 그림”을 그리는 장영철씨 자신이 ‘오대산 진경산수’의 일부다.

그보다 몇 해 앞서 2009년엔 월정사에서 한 나무작가의 달마 전시회가 열렸다. 눈이 툭 튀어나오고 얼굴도 일그러진 나무로 만든 달마상 수십 점이 금강루에 놓였다. 어찌 보면 서양의 철학자처럼 생겼고, 어찌 보면 업보에 짓눌린 표정이 생생한 달마상이다. 달마대사가 불법을 전하려고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것이 그의 나이 150살이라던가. 수백 번 거친 사포로 어루만지고 때수건으로 때를 올린 닳고 닳은 나뭇결을 달마의 표정에 새긴 이는 나무공예를 하는 이규석(64)씨다. 이씨는 평창과 진부의 골짜기에 25년을 살며 나무 조각을 해왔다. 계곡에 숨어 산다고 해서 한 스님이 ‘은곡’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지은 지 150년 된 너와집에서 군불을 때며 살면서 판소리꾼인 딸 이소영씨가 골짜기에서 소리할 때면 북도 잡아주고 소리도 주고받고 했더니 부근에서는 나무조각가보다는 소리하는 부녀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 집이 형체도 없이 바스러져버린 뒤에는 진부 톨게이트 부근에 있는 한옥 체험관 한쪽에 전시장과 작업실을 차렸다.

» 조각가 이규석씨의 눈이 어두워졌다. 백내장이 왔다. 하지만 예수상에 때를 올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절 아래서 조각을 하지만, 예수도 부처도 달마도 모두 나무 안에 깃들었으니 꺼낼 뿐이다.

처마 끝의 바람, 평생을 염원한 무의 세계

한때는 속리산에서 호텔과 카바레를 경영했고, 조각을 시작한 뒤로는 서울에서 5차례 개인전을 열었다며 왜 골짜기로 와서 달마의 화두 ‘무’를 붙들었을까? “오대산이 갖고 있는 기운이 나와 맞았어요. 원래 제 마음이 붙드는 게 있는 거예요. 호텔 문을 닫고 나면 사방이 돈이었지만 마음이 헤매고 다녔어. 원래 산속에 초가집 짓고 사는 게 꿈이었어요. 수행은 스님만 하는 게 아니죠. 조각도 수행이고, 마음이 수행이죠.” 달마대사는 9년 동안 벽만 보고서 화두를 지폈지만, 그는 30년 동안 수행하듯 달마만을 깎아왔다. 돌이켜보니 달마 얼굴이 같은 날이 별로 없다. “어느 때는 아무리 파도 나빠지기만 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달마가 갑자기 성숙하죠. 사람이 그렇듯 항상 바뀌죠.” 이제는 한쪽 눈도 잘 보이지 않지만 월정사와 상원사 오가는 길을 걷다 보면 이제야 문득 개울 물소리가 들린단다.

“오대산 자락에는 구도하는 이들이 산다”고 한 사람은 소설가 신동화(66)씨다. 한국문학예술진흥원에서 일하다 퇴직한 뒤 진부로 와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얼핏 평탄해 보이는 신동화씨의 속에 들끓는 이력도 만만치 않다. 5·16 쿠데타로 당시 군인이던 아버지가 강제 예편당하자 집안이 갑자기 기울었단다. 대학에 합격해도 갈 수 없는 형편이 되자 해병대에 입대해버렸다. 거기서 베트남으로 파병된 뒤 7개월 만에 작전에 참가했다가 다리를 하나 잃었다. 매캐한 연기가 걷히기 전에 발목지뢰를 밟았고 한쪽 다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이제 상이군인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 자리에서 총구를 목에 대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지뢰 폭발로 공이조차 구부러진 총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때의 비정한 경험을 담은 희곡 <탈존>으로 <우리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러다 퇴직한 뒤 홀연히 오대산 부근으로 옮겨 10년 동안 <늑대는 주인이 없다> <울지 않는 종> 등 장편소설만 내리 4편을 썼다. 소설에서 작가는 절의 처마 끝을 쓰다듬는 오대산의 찬바람을 묘사한다. 평생을 염원했던 무의 세계를 거듭 말한다.

신동화씨가 사는 상원5리는 마을 전체에 11가구밖에 살지 않는 외진 곳이다. 소설을 쓰든 공연을 하든 평단의 눈에 띄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때문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평단에 쥐어 있다”는 것이 그의 평이다. “여기 내려오니 이미 그런 평에 초연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나도 지금까지 구도소설을 쓰던 사람이라 이런 산골짜기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내가 이 나이에 이토록 소설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평생을 살아오며 느끼고 깨우치고 고민하고 슬퍼했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눴으면 좋겠다고 해서 썼다. 깨우친 만큼 나눈다.” 신·구약 성서를 5번 통독하고 금강경·법화경을 오래 익힌 세월은 머리로 깨우친 세월이었다면, 이곳으로 온 10년은 나무나 고라니와 말을 튼 세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모두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자신의 화두를 하나씩 붙들고 있더란다.

» 어린 시절의 비참한 가난, 베트남전쟁에서 잃은 다리, 새로 짓는 박물관의 관직 초대가 신동환씨의 입으로 들으면 ‘소설’처럼 되어버린다. 신씨는 인생에 머무르는 희로애락을 소설처럼 즐기고 웃어넘기는 여유로움을 가졌다.

평단에서 멀어지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더라

오대산 자락에는 돌아온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쓴 소설가 김도연도, 20년 넘게 산중에서 수행해온 철학자 박해조도 산다. 평창 쪽에만 서울에서 온 예술하는 이들이 20명 남짓 된다는 소문도 있다. 그중 대부분은 일껏 만나서 술잔을 섞고 나더니 자신을 여기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해서 서울 올라오는 길에 이야기와 사진을 버렸다. 시인 고은의 말을 빌리면, 오대산은 이런 문수동자들을 제멋대로 자라게 놓아두고 있었다.

평창=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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