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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混沌)을 파괴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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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1-10 10:29 조회6,9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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混沌을 파괴하지 않는 사람

南海之帝를 爲倏이요 北海之帝를 爲忽이요 中央之帝를 爲渾沌이라 倏與忽이 時相與遇於渾沌之地하면 渾沌은 待之甚善이라. 倏與忽이 謨報渾沌之德曰, 人皆有七竅하여 以視聽食息이어늘 此獨無有하니 嘗試鑿之하리라하고는 日鑿一竅에 七日而渾沌死라.

남해(南海)의 임금을 숙(倏)이라 하고 북해(北海)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고 중앙(中央)의 임금을 혼돈이라 한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이 사는 곳에서 만나면 혼돈은 이 두 사람을 아주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에게서 받은 은덕에 보답하고자 서로 상의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목구비(耳目口鼻) 등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생각하는데 혼돈에게만 없다. 그러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 주자.”

이렇게 하여 매일 한 구멍씩 뚫어 주었다. 그런데 이레째가 되는 날, 일곱 구멍이 다 만들어지자 그만 혼돈은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 우화에서 숙(倏)이란 한생각 일어나는 것을 비유하고, 홀(忽)이란 한생각 멸하는 것을, 혼돈(渾沌)은 한생각이 나고 멸하기 전 곧 이름 생기기 이전이요 우주 생기기 이전을 비유한다. 숙과 홀은 모두 ‘문득’, 또는 ‘빠르다’ 는 뜻을 가진 말을 의인화(擬人化)한 것으로 곧 인위(人爲)의 분별지(分別智)이며, 혼돈은 자연지(自然智)로서 곧 무위의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의미한 것이다.

혼돈은 시비가 끊어진 자리이므로 숙과 홀에 대해 무분별의 대접을 잘 할 수 있었으나, 숙과 홀은 인위의 차별지(差別智)로 그 은혜를 갚으려 한 것이 오히려 혼돈의 죽음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과연 우주 개벽 이래 혼돈을 파괴하지 않는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가!

또『장자(莊子)』「추수편(秋水篇)」에는 이런 말이 있다.

莊子가 釣於濮水한대 楚王이 使大夫二人하여 往先焉曰, 願以境內累矣로소이다 莊子 持竿不顧曰, 吾聞楚有神龜하여 死巳三千歲矣라 王巾笥而藏之廟堂之上이라하니 此龜者는 寧其死爲留骨而貴乎아 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아 二大夫曰, 寧生而曳尾於塗中이니이다 莊子曰, 往矣어다 吾將曳尾於塗中호리라.

장자가 복수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초왕(楚王)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서 “선생께서 우리나라 정치(임금자리)를 맡아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들으니 초나라에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 거북이는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는데, 왕은 이 거북이를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서 종묘에 모셔 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말이오 그 거북이는 죽어서 이렇게 뼈만 남긴 채 귀하게 되기를 바라겠소? 아니면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면서 살기를 바라겠소?”

두 대부가 말하였다.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게 낫지요.”

장자는 말하였다.
“어서 물러가시오. 나 역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면서 자유스럽게 사는 것이 좋소.”

이 우화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부귀공명이 하찮은 것인 줄은 다 알면서도 그 부귀공명을 얻기 위해서 애쓴다. 심지어는 내일 공동묘지에 갈지언정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천지개벽 이래 천하에 혼돈을 파괴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익을 위해 죽고 선비는 명예를 위해서, 대관은 조상을 위해서, 대인(大人)은 천하를 위해 죽는다. 그러나 혼돈을 파괴함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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