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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의 망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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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1-01 17:35 조회6,7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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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의 망상심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간을 제도하는 데 있다. 따라서 모든 종교의 시원(始源)도 이러한 인간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다만 궁극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방법만이 각 종파와 종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이러한 점은 불교도 마찬가지로서 인간의 절대적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한 사람의 원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는 용어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또는 불교를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인도 카필라성의 태자 싯다르타는 어느 봄날 궁중 밖을 구경 나갔다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얽혀서 고통 받고 있는 생명을 보고 문득 인간의 생에 대한 의심이 솟구친 것이다. ‘대체 생(生)이란 어떤 것이며, 왜 저 사람은 뭇 고통을 받고 있는가? 또 저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불교는 이와 같이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가 갖가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즉 이것이 불교의 중생제도라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생로병사이다. 모든 고통은 생(生)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생(生)이 있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이 뒤따른다. 이것은 생명을 갖고 있는 중생이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다. 이 세상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늙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생로병사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로병사가 ‘있다’고 보는 데서 기인한다. 생사가 있다고 인정할 때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특히 이러한 입장은 소승불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일체를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사도 있고 고통도 있는 것으로 본다. 소승불교는 이러한 유(有)사상, 즉 고(苦)․집(集)․멸(滅)․도(道) 사제법(四諦法)으로 그 기본을 삼는다.

따라서 소승불교에서는 고통을 보면 항상 싫어하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고(苦)의 존재를 전제하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망상의 집착을 끊어야 하고 또 멸도(滅道)를 닦아 증득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고(苦)는 자기의 육체로써 감지(感知)하는 지극히 소아적(小我的)인 고통이다. 그래서 소승불교에서 수도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고 또 자기만 제도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제도가 참뜻의 제도일 수는 없지만 그들은 고가 있는 것은 육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자신의 육체를 떨어버리기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대개 고(苦)를 여덟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것은 생(生)․로(老)․병(病)․사(死)와 애별리고(愛別離苦)․원증회고(怨憎會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이다. 생로병사도 큰 고통이지만 정든 사람끼리 헤어지는 것도 큰 고통이고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큰 고통이다. 그리고 원하는 바를 취하지 못하는 고통도 작은 고통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고통은 오음(五陰)이 치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 육체적 욕망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괴로움이다. 이와 같은 뭇 고통을 중생이면 누구나 받아야 한다.

그래서 소승불교의 방편은 한 마디로 포고단집 망멸수도(怖苦斷集 望滅修道: 괴로움이 두려워 괴로움의 원인을 끊고 적멸을 소망하여 도를 닦는다)라고 할 수 있다. ‘있다’고 보는 소승적 입장은 현상적인 것을 그대로 존재로써 긍정한다. 그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엄연히 있고 육체의 생로병사가 여실하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시간이 존재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세계가 현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있다는 생각, 그 견해가 바로 고통의 원인인 줄을 모른다.

그러면 대승의 입장은 어떤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승불교에서는 생사란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도 없고 고집멸도의 사제(四諦)도 없다. 생사가 없는데 어찌 고통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자. 생사란 바다에 일어나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중생은 바다를 보지 않고 물거품만 보고 생멸이 있다고 한다. 또한 중생의 나고 죽음은 금(金)이 기술자의 솜씨에 따라 가락지도 되고 목걸이도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락지나 목걸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래서 대승불교는 공(空)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체는 공한 것이고 모든 존재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이 ‘없는 도리’, ‘공한 이치’를 터득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망상에 집착하여 본래의 이치, 근본의 자리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떠날 날이 없다. 죽는 날까지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마음을 반조하지 않으면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고, 바른 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心不反照 看經無益 不信正法 苦行無益)”는 말과 같이 공한 이치를 관조할 줄 모르면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보고 오래 좌선을 해도 이익될 것이 없을 것이요, 부처님의 바른 법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으면 수도한들 무엇에 쓸 것인가?

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자칭 도인입네 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몇 해 동안 어느 고승 밑에서 경을 보았다느니” 또는 “어떤 선사의 선방에서 몇 년을 참선했다느니” 하면서 도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도량(깨친 세계)을 딱 헤아리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들이 정말 그 오랜 세월의 공부로 생사가 없는 공한 자리를 보았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불교란 잘못 배우면 오히려 중생을 오도(誤導)하기 쉬운 것이다.

근본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관조하지 못하는 공부는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지만 남에게도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 우리 중생도 이와 같이 사견(邪見)과 망상에만 사로잡혀 본래의 이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생사가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이다.

생사는 물거품이다.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생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의 망상이다. 이 망상을 떨쳐 버려야 한다. 망상을 떨쳐 버릴 때 생사는 초월되고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그 경지가 바로 해탈이요 성불이다.

망상이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뭇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망상에서 벗어나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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