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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 세계_2. 화엄경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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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9-22 19:26 조회8,4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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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엄경』의 성격

화엄경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오도하신 후 최초 3․7일(21일) 간의 설법이라고 전한다.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친히 체득한 도리, 그대로를 여실이 털어 놓은 법문이다. 그 후에 아함부 경전을 12년, 방등부 경전을 8년, 반야부 경전을 21년, 끝으로 법화․열반을 8년 설해서 총 49년을 설법하셨다. 만약 중생들이 화엄의 도리를 알아들었다면 그 이후의 설법은 없었을 것이다.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
만일 산 속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던들
어찌 황엽(黃葉)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까 보냐.”

위의 시구처럼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짐짓 산에서 내려와 누런 단풍잎을 들고 어린 아이들을 달래는 설법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엄의 도리는 그리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불가불 부처님은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던 것이다. 결국 돌이켜보면 화엄경 설법 이외의 49년 설법은 화엄의 도리를 알리기 위하여 설해진 방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함부(阿含部)나 방등부(方等部) 경전은 유치원이나 중학교 과정 정도가 될 것이고 화엄은 대학원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니 인류를 구할 사람이라면 최고의 학문 최고의 사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부처님은 명백히 화엄의 도리를 가지고, 당신께서 설하시고자 하신 법문의 핵심을 삼으셨다고 볼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 밖의 다른 법문은 화엄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과정으로 차제설법을 하신 것이다.

다시 비유로 말하면『화엄경』은 큰 바다에서 노는 것이고, 기타의 법문은 강물에서 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화엄경』도리를 모르면 모두가 단편에 불과하다. 큰 도리를 보고 나면 무엇이든 그 속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화엄경』에서 삼주인과(三周因果)를 밝힌 것을 보면, 노사나불이 과거․현재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성불한다. 이것이 일주인과(一周因果)이다. 일주인과(一周因果),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과덕(果德)인 것이다. 보살이 닦아가는 데 있어서 이것을 신(信, 믿음)으로 삼는 것이다. 즉 보살은 부처님의 과덕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십신(十信)이다. “과거 제불이 성불한 것과 중생의 우글대는 망상과 똑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과덕이 곧 내 마음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고 이것 밖의 다른 믿음은 삿된 믿음이다. 그래서 십신(十信)은 위로 치지 않는다. 닦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신이 만족해야 비로소 주초(住初)라고 한다.

‘초발심시(初發心時)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는 말은『화엄경』에서만 나온다. 믿음이 갖추어지면 바로 발심주(發心住)가 되는 것이다. 발심주에서 발심하면 곧 정각을 이루는 도리가 있다.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내 마음이 똑 같다고 믿으면 발심주가 되는 것이다. 주(住)라 하는 것은 진리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주(住)에 머무른 다음은 십행(十行)이다. 주(住)가 진리의 핵심이라면 행(行)은 바깥쪽이다. 그렇다고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주(住)에 치우쳐도 안 되고 행에 치우쳐도 안 된다. 행(行)에 치우치게 되면 도로 세속이 된다. 그러므로 주(住)와 행이 하나가 되는 것이 회향(廻向)이다.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 이렇게 해서 보살이 닦아가는 십지(十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고 보면『화엄경』수행은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 사람은 할 것이 못 된다는 공포심을 낼 것이다. 때문에 선재동자(善財童子)와 같이 박지범부(薄地凡夫)를 대표하는 군상(群像)들이 나와서 여실하게 성취하는 과정을 보인 것이다. 선재동자의 일행은 오백 동자, 오백 동녀, 오백 우바새, 오백 우바이, 육천 비구 등 일만 팔천의 대중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박지범부다. 선재동자가 앞장 서서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친견하고 일생 동안에 광겁지과(廣劫之果)를 다 마쳐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낼 필요가 없다. 누구나 광겁지과를 일생 동안에 다 마치는 것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원래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는 것이『화엄경』의 도리이다. 누구든지 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이『화엄경』도리이다. 이것을 못 믿으면 하열한 근기라고 한다. 근기가 낮다는 뜻이다. 이 도리를 믿는 중생을 대심(大心)중생이라고 한다. 대심중생이란 ‘부처님과 중생의 과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는 중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통현의『화엄론(華嚴論)』에 이르기를 “다른 경에는 혹 퇴전하는 것이 있지만 이『화엄경』에서는 절대 퇴전(退轉)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왜냐 하면 퇴전이란 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안 된다’, 또는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퇴전의 여지가 있겠는가. 참으로 이 점이『화엄경』의 독특한 경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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