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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는 나도 절 받는 부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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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9-03 15:10 조회7,8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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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는 나도 절 받는 부처도 없다

세간에서는 흔히들 일곱 가지 보물(七寶)을 귀하게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불(佛)․법(法)․승(僧)을 삼보(三寶)라 하여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삼보를 주지삼보(住持三寶)․별상삼보(別相三寶)․동체삼보(同體三寶)로 분류합니다.

먼저 ‘주지삼보(住持三寶)’란 무엇인가.
주지삼보에서 불보란 돌이나 나무로 조각한 불상, 불화(佛畵) 등을 가리켜 불보(佛寶)라 합니다.  법보(法寶)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 즉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팔만대장경을 법보(法寶)라 합니다. 승보(僧寶)란 머리 깎고 수도하는 스님들을 승보라고 합니다. 이상의 이 세 가지를 ‘주지삼보’라 합니다.

다음 ‘별상삼보’란 무엇인가.
별상삼보에서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불보라 하고, 교리행과(敎理行果) 즉 경전에 담겨진 내용을 법보라 하며,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의 보살을 가리켜 승보라고 합니다. 십주보살을 초현(初賢), 십행보살을 중현(中賢), 십회향보살을 상현(上賢), 십지보살을 성인이라 합니다. 십주, 십행, 십회향보살을 성인이라고 하지 않고 현인(賢人)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깨달음의 경지가 성인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동체삼보란 무엇인가.
부처님만 삼보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도 삼보가 갖추어져 있고, 우리 마음에만 삼보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이 다 삼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자성은 본래가 신령스럽게 깨닫는 영각(靈覺)입니다. 이 마음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령스럽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병원에 가서 몸에 마취약을 놓고 의사가 몸의 한 부분을 도려낼 때 마취약 때문에 칼 소리만 들릴 뿐, 아픈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각은 우리의 몸을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당체(當體)를 찾아보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라고 하는데 이 시공이 끊어진 마음자리를 곧 불보라 합니다.

우리는 늘 이 우주의 텅 빈 공간 속에서 육체를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 이것을 법보라고 합니다. 또 이 마음자리는 동서남북, 동서고금으로 아무리 찾아보아도 자취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성(本性)이 본래 적멸(寂滅)하기 때문입니다. 이 적멸한 자리를 법보라 합니다.

자성 자리는 본래 괴쟁(乖諍)이 없습니다. 어긋나고 다툼이 없고 상대가 없기 때문에 이 우주 만유 속에 홀로 우뚝합니다. 거기에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가 없으니 적이 없고 적이 없으니 다툼과 어긋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승보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월정사 법당에 모신 이 부처님은 주지삼보의 하나인데 이 부처님하고,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죽지 않고 신령스럽게 지각하는 마음자리, 이것이 둘인가, 하나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일체중생이 자기 마음 속에 분별각지 하는 영각 자리를 동체삼보 가운데 불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법당에 이렇게 큰 부처님을 모셨습니까? 주지삼보와 동체삼보의 두 가지 원리는 둘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허공이 없으면 천지, 우주의 삼라만상이 건립될 수 없으며 또한 허공 속에 천지와 삼라만상이 없다면 우리의 살림살이가 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전국왕(優闐國王)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머님을 제도하기 위하여 도리천에 올라가 4개월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우전국왕은 부처님을 뵙고 싶어서 전단향으로 부처님 모습을 만들어 놓고 조석으로 예불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내려오시자 탁자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이 스스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왜냐 하면 진짜 부처님이 나타나시니 가짜가 저절로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 등상불의 이마를 만지면서 마정수기(摩頂受記)를 하셨습니다.

“네가 내세에 내 대신 이 중생계를 위해서 인연을 짓고 복을 지으리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이나 등신불이나 절대 둘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후 지금까지 주지삼보인 등신불을 모셔 놓고 8만4천 경전을 외우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상(相)’이란 분명 헛것입니다. 그러나 상이 없는 그 자리가 진리라 하여 상(相)을 무시해 버리고 진리만 탐구한다면 그건 반쪽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이 끊어진 그 본면목의 진리를 부정해 버리고 껍데기만 숭상하는 것 또한 반쪽입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火〕은 그 원소가 우주에 가득 차 있지만 전등이라는 기구를 통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불의 원소가 우주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무와 나무를 비벼도 불이 생기고, 돌과 돌을 서로 쳐도 불이 생기지만, 물질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의 형상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같습니다. 음파가 공간에 가득 차 있지만 기계를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양 없는 이 놈과 모양 있는 이 놈이 둘이라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장경의 교리를 화의돈(化儀頓), 축기돈(逐機頓) 두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화의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화의 방법을 활용하여 점진적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아들을 위해서, 내 남편을 위해서 복을 빌고 다니다가 점차적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축기돈이란 원래 근기가 뛰어나서 한 마디 말씀에 모든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성불하는 방법을 두 가지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 법회에 참여하신 여러분이 부처님께 예배를 올릴 때에 과연 절하는 내〔我〕가 어디 있으며 절을 받는 부처님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관(觀)하여 절하는 나도 없고 절 받는 부처님도 없는 그런 경지를 본다면 그것이 바로 축기돈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개금불사를 통해서 오대산 부처님께 큰 인연을 맺어서 앞으로 축기돈이든 화의돈이든 깨달음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 이 법어는 1980년 9월 17일, 월정사 법당 불상개금 회향기도 때에 하신 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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